[한국은 인재 전쟁 무방비] 중국 기업의 인력·기술 전쟁터 된 한국

공장장·임원급이 스카우트 타깃…기술 유출로 이어질 땐 천문학적 피해

<YONHAP PHOTO-1294> (110901) -- WEIHAI, Sept. 1, 2011 (Xinhua) -- Photo taken on Aug. 22, 2011 shows a vessel is under construction at a port of Shandong Huanghai Shipbuilding Co., Ltd. in Weihai City, east China's Shandong Province. China's Purchasing Managers' Index (PMI) rebounded to 50.9 percent in August from a 29-month low of 50.7 percent for July, the China Federation of Logistics and Purchasing (CFLP) said on Sept. 1. The August figure ended four consecutive months of decline. (Xinhua/Guo Xulei) (lfj)/2011-09-01 15:19:33/ <저작권자 ⓒ 1980-201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사례1. 2011년 5월 당시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사내 보안을 강화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발단은 기술 직원의 이직이었다.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연구 인력 중 일부가 중국 내 2위 업체인 TCL로 직장을 옮긴 것. 공교롭게도 한국인 직원 영입 이후 TCL은 중국 내에 8세대 LCD 생산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LCD 업계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오른 순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장이 직접 나서 보안과 인력 관리를 지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례 2. K 씨는 2012년 11월 ‘이미지 센서 반도체’ 개발 회사인 Y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곧 기술 개발에 한계를 느꼈고 이에 D사 ‘이미지 센서 반도체 설계 분야’ 책임자인 Y 씨에게 접근했다. K 씨는 Y 씨에게 “싱가포르에 중국과 합자회사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설명한 후 싱가포르 근무 시 주택 및 거액의 연봉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대가는 Y사의 기술 자료였다. Y 씨는 D사 퇴사를 앞두고 회사 서버에 접촉해 ‘이미지 센서(CMOS) 회로도’ 등 반도체 설계 자료 1000여 장을 출력해 유출하려다 적발됐다.

전후 한국의 산업은 미국과 일본, 특히 가까운 이웃나라인 일본의 기술력에 크게 의존했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같은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들도 핵심 기술의 상당수를 일본인들에게서 전수 받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고초려하며 일본인 기술자들을 고문으로 영입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 사정이 바뀌었다. 과거 해외 인재 영입에 총력을 기울였던 한국이 이제는 인재 유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중국으로의 인력 유출이다.

사실 원천 기술만 놓고 따지면 중국의 기술력은 한국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중국은 항공모함, 유인 우주비행선, 스텔스 전투기 등을 자체 생산하는 과학기술 강국이다. 하지만 산업 기술로 눈을 돌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조선·자동차·스마트폰 등 정보기술(IT)·디스플레이·화학·철강·반도체 등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한국의 주요 산업에선 중국이 우리보다 몇 년씩 뒤져 있는 게 많다. 실제로 화웨이·ZTE 같은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은 삼성전자나 LG전자의 퇴직 임원들을 경쟁적으로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직접 공장에서 일했던 공장장이나 사업을 총괄했던 임원급이 핵심 영입 대상”이라고 한다. 중국의 조선·전자 업계 등을 보면 한국인 직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게 현지 풍경이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기업인 BOE의 주력도 한국인 직원들이다. BOE는 2003년 백라이트 유닛과 조명·태양광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한국 기업 하이디스를 인수했다. 인력과 생산 기술을 단기간에 확보하는 방법으로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한 것이다.


기술 유출 사건 절반이 중국
관련 전문가들에 따르면 산업 기밀 유출은 크게 기술 유출과 인력 유출로 나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기술의 원천이 바로 인력이기 때문이다. 2007년 국내 대형 조선 업체인 D사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Y 씨는 회사의 기술 자료를 관리하는 총책임자였다. 그는 지식 관리 시스템(D-Know) 서버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활용해 공정도, 설계 완료 보고서 등 무려 1100여 개의 파일을 다운 받아 외장 하드디스크에 저장해 회사 밖으로 빼돌렸다. Y 씨는 또 원유운반선·천연액화가스선·액화석유가스선·석유정제운반선·자동차운반선 등의 파일이 있는 서버에 접속한 후 69척의 실적선에 대한 완성도 등 10만9800여 개의 파일 역시 외장 하드디스크에 담아 밀반출했다. Y 씨는 이 자료들을 중국의 경쟁 업체에 넘기려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천만다행으로 Y 씨의 대담한 범죄가 사전에 막혔지만 그가 빼돌린 자료가 중국에 넘어갔을 경우 피해액은 기술 개발비로만 계산해도 5717억 원에 이른다는 게 업계의 얘기였다. 중국 조선 업계가 이 기술들을 입수했다면 향후 5년간 약 35조 원 상당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한국과의 기술 격차 역시 2~3년 앞당겨졌을 것으로 추산됐다.

Y 씨의 사례는 인력 유출·관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재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방법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현직에 있는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실직한 상태에서 다른 경쟁사로 옮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지는 몰라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설계도면 같은 핵심 기술 자료를 유출했을 때에만 법적 처벌이 가능하다. 머릿속에 담아가는 것은 전혀 제재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산업기밀보호센터 자료에 따르면 기술 유출의 주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전직 직원(60.8%)이다. 둘째 비중은 현직 직원(19.6%)이다. 두 주체를 합하면 내부 인력에 의한 기술 유출이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센터 관계자는 “몇 배의 연봉과 아파트·자동차까지 제공하는 상황에서 달콤한 제의를 뿌리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원천 기술보다 상용 기술에 눈독
현재 국내 기업 중 보안 전담 조직과 인력을 갖춘 곳은 많지 않다. 소수의 대기업만 보안 전담 조직을 운영 중이다. 그나마 퇴직 후에도 핵심 인력을 고문이나 협력업체 임원으로 고용해 관리하는 곳은 삼성전자 정도다. 중소기업으로 가면 아예 인력 관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무한 곳이 태반이다. 중국 등 경쟁국이 특히 임원급에 주목하는 이유는 개별 기술 활용도를 넘어 산업 전반을 관리하는 능력 때문이다. 몇몇 기술 인력을 유입했다고 하더라도 개개 기술을 넘어 세트로까지 발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쉽게 비유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기술을 확보했다고 해서 당장 완제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반면 임원급은 기술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지라도 개별 기술들을 하나로 엮어 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산업기밀보호센터 관계자는 “국내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 사건은 주로 고액 연봉 등 금전적인 보상을 미끼로 핵심 연구 인력 및 임원급을 대상으로 한 인력 유출이 가장 많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한국의 인력과 기술에 유독 눈독을 들이는 것은 산업 환경적 요인이 크다. 한국은 첨단 기술 연구·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는 미국·일본·독일 같은 나라와는 사정이 다르다. 원천 기술도 이들 나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삼성·LG·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첨단·신기술 연구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소·벤처기업의 신기술 개발도 꾸준히 이어지면서 한국은 원천 기술보다 선진국의 첨단 기술을 발전·응용하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돈이 되는 산업 기술 면에선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고 몇몇 분야에선 한국산 제품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 등 후발국으로선 선진국의 원천 기술도 중요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제품의 생산·판매가 가능한 상용 기술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경쟁 업체가 개발 중인 원천 기술을 불법으로 유출해 제품을 생산하면 원천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비해 연구비를 회수할 필요가 없게 된다. 제품을 생산해 생산 이윤만 남기면 그만이기 때문에 가격을 대폭 낮춰 시장을 이른 시간 안에 잠식할 수 있다. 한국이 경쟁국 산업스파이들의 각축장이 된 배경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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