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전쟁이 뒤바꾼 르노의 기구한 운명

나치 전범 기업에서 프랑스의 ‘국민차’로…종전 후 국유화됐다 1996년 민영화

French President Jacques Chirac, right, and Transport Minister Gilles de Robien, center, listen to Renault President Louis Schweitzer during the inauguration of the Paris Motor Show Friday, Sept. 24, 2004. The show opens to the public on Saturday and runs through Oct. 10. (AP Photo/Jack Dabaghian, Pool)

미국 유타 주의 보네빌 소금 평원, 1956년 9월 5일 이곳에 블루 컬러의 낯선 차량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차량은 당시 생산되던 여느 차량과 완전히 다른 유선형의 낮은 차체를 갖췄다.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르노(Renault)가 제작한 슈퍼카 ‘에톨레 필랑테(Etoile Filante)’였다. 우리말로 ‘별똥별(Shooting star)’이라는 뜻이다. 이윽고 차량이 굉음을 내뿜으며 달려 나갔고 잠시 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차량이 최고 속도 시속 308.85km라는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매우 높은 이 기록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였다. 양산 브랜드 중 하나에 불과했던 르노는 이를 계기로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주목 받는 회사로 떠올랐다.

서민들이 즐겨 타는 소형차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르노는 새롭고 강한 기술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포뮬러원(F1)의 강력한 엔진 제조사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르노는 1977년부터 F1에 참여했으며 2013년까지 4년 연속 챔피언 팀인 레드불을 비롯해 윌리엄스·로터스·케이터햄 등 4개 F1팀이 현재 이 회사의 엔진을 이용 중이다.


르노 3형제, 자동차를 만들다
르노는 115년의 긴 역사를 가진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이자 세계에서 넷째로 큰 생산 규모(르노-닛산 얼라이언스)를 자랑한다. 1차 세계대전 때는 혁혁한 공헌자로,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협력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한 르노는 국유화·민영화, 역사적인 인수·합병(M&A)을 거치면서 굴지의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는 등 드라마틱한 역사를 갖고 있다.
르노의 설립자는 루이 르노(1877~1944년)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던 루이 르노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공학도이기도 했다. 1898년 스물한 살의 그는 ‘드 디옹 부통(De Dion-Bouton)’이란 자동차 회사 엔진을 탑재한 자신만의 1호차를 만들었다. 그는 이 차에 ‘부아튀레트(Voiturette)’란 이름을 붙였다. 작은 자동차라는 뜻으로 ‘1CV’로도 불렸다. 2인승짜리 부아튀레트는 차체가 작았지만 성능은 부족하지 않았다. 확신을 얻은 그는 친형 마르셀 르노, 페르낭 르노와 함께 의기투합해 자동차 제조사를 설립했다. 3형제가 만든 회사명은 이들의 성을 땄다. 1899년 르노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르노는 이후 1905년 출시한 AG1이 택시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사세가 확장됐다. 르노가 프랑스 최대 기업으로 성장한 계기는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이다. 버스와 트럭으로 차종 확대한 직후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FT-17 탱크도 생산하는 등 프랑스 군수 기업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18년 이후에는 농업혁명의 바람을 타고 농기계 사업에도 진출했다. 시의적절한 신사업 진출은 회사에 날개를 달아줬다. 르노의 성장세는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르노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회사 창립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프랑스 기업인 르노도 독일군의 통제를 받았다. 당시 독일군은 자국의 자동차 회사, 즉 다임러와 벤츠의 근로자를 르노 공장에 배치해 군수 물자를 생산하도록 했다. 프랑스의 탱크를 생산하던 르노가 독일의 전차를 만든 셈이다. 자연스레 연합군은 르노의 공장을 노렸고 1942년 3월 공습을 감행해 파괴시켰다. 루이 르노가 1899년부터 40여 년간 공들여 쌓은 성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충격을 받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1944년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벗어나자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됐다. 여기에 루이 르노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끝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겨내지 못했다. 감옥에 수감된 루이 르노는 한 달 만에 사망했다.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르노의 자산을 몰수했고 르노자동차는 국영기업이 됐다.

나치에 협력한 르노에 죄를 물어 국유화한 프랑스 정부가 또 다른 나치 협력자에게 도움을 받아 프랑스 국민차를 만든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1947년 등장한 소형차 ‘4CV’가 그 주인공이다. 이 차는 천재 엔지니어이자 포르쉐의 설립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개발에 참여했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국민차 프로젝트’를 주도해 ‘비틀’을 만든 인물이다. 그 역시 이로 인해 전쟁이 끝난 후 고초를 겪었다.

배경이야 어쨌든 포르쉐 박사의 손길을 거친 4CV는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수요가 늘어 판매량도 상승하며 1950년대 프랑스의 국민차로 떠올랐다. 4CV의 명성은 1961년 출시된 ‘르노4’가 이어받았다. 이 차량은 ‘값싸고 실용적이고 튼튼한 차’라는 강점으로 시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출시 5년 만인 1966년 누적 생산 100만 대를 돌파했고 1994년 단종될 때까지 33년간 총 813만5424대가 팔렸다. 1970년대 르노를 프랑스는 물론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사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4CV·르노4로 프랑스 국민 기업 등극
프랑스 정부는 르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국의 제조업을 살려야 경제도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1970년대까지 풍부한 자금과 정책 지원까지 확실하게 뒷받침 받은 르노는 생산 시설 확충과 자동차 관련 기업들의 M&A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르노는 1950년 작은 규모의 중대형 상용차 업체인 소무아(Somua)와 라틸(Latil)을 흡수해 1955년 트럭·버스 제조사 ‘사비엠(Saviem)’과 합병했다. 첫 외형 확장이다. 1978년 이 회사는 시트로엥의 자회사와 합병해 상용차의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르노 비클스 인더스트리얼스(RVI)’로 거듭났다. 시트로엥의 자회사인 ‘오토모빌스 엠 베를리에(Berliet)’는 당시 경영난에 봉착해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회사의 인수 및 사비엠과 합병 과정에 총 22억 프랑을 투입했다. 이 금액은 유로로 환산하면 3억3540만 유로에 달하는 규모였다.

1966년에는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푸조·볼보와 기술적인 업무 제휴를 맺고 공동 엔진을 제작했고 각 사의 차량에 탑재해 출시했다. 프랑스와 유럽 시장에서 기반을 다진 르노는 눈을 미국으로 돌렸다. 1979년 미국의 ‘AMC’와 ‘맥트럭’의 지분을 각각 몇 22.5%, 20%씩 사들이면서 북미 지역 판매 거점 확충에도 나섰다. 르노의 당찬 도전이었다. 얼마 후 르노는 AMC가 파산 위기를 겪자 투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자금 지원을 통해 이 회사 지분을 47.5%까지 늘렸고 맥트럭도 1983년 44.6%까지 지분을 추가로 확보했다.


<YONHAP PHOTO-0176> Workers assemble a car at the Renault automobile manufacturing plant in Curitiba February 17, 2009. Around 500 workers of the factory were called back to work starting mid-March after being put on temporary leave in January, as the sales slump seemed to be reversing, the company said on Tuesday. REUTERS/Cesar Ferrari (BRAZIL)/2009-02-18 05:50:49/ <????沅??? ?? 1980-2009 ???고?⑸?댁?? 臾대? ??? ?щ같? 湲?吏?.>

미국 시장 도전은 실패했다. 큰 차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미국에서 프랑스의 작은 차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를 비롯해 다양한 주변 환경이 르노에 등을 돌리면서 이 회사는 1984년부터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1980년대 쇠락기를 맞았다. 인건비 상승과 불안정한 노사 관계, RVI의 부진 등이 겹쳤기 때문이다. 승용차 부문도 문제였다. 르노4의 판매량은 나쁘지 않았지만 마땅한 후속 모델이 없었다. 다른 차종들도 제품 차별화에 실패하면서 판매량이 급감했다. 결국 르노는 1987년 AMC를 크라이슬러에 매각(크라이슬러는 인수 후 ‘JEEP’로 사명 변경)했고 인력 감축과 불필요한 사업 철수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정부는 이때 120억 프랑의 보조금을 수혈해 주면서 1991년 9월 회사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르노를 포함한 21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르노는 주식회사가 돼 볼보와 주식을 상호 교환하며 합병을 추진했다.


민영화 프로젝트 이끈 루이 슈바이처
이 시기에 정부의 구원투수 한 명이 르노에 입사했다. 구조조정과 민영화라는 난제를 풀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이의 이름은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 행정가 루이 슈바이처(Louis Schweitzer)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아프리카의 성인’인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역임한 부친은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처조카이기도 했다. 명문가 출신답게 프랑스 국립행정대학원을 졸업한 후 오랜 기간 재경부에 몸담았다. 로랑 파비우스 전 총리(현 외무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을 맡은 뒤 1986년 르노그룹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큰 키에 뿔테 안경을 걸친 40대 중반의 슈바이처는 전형적인 학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의 부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업계의 우려가 확산됐다. 슈바이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근차근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1993년 79%에 달했던 프랑스 정부의 르노 지분율은 1996년 46%까지 낮아졌다. 처분 주식은 개인과 기관투자가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에게도 분배됐다. 프랑스 정부는 경영 부진을 계기로 부족한 정부 재원을 충당하고 유럽연합(EU) 통합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르노를 국유화한 지 51년 만에 르노의 소유주가 민간으로 넘어갔고 의사 결정은 전부 르노 측이 맡게 됐다. 민영화를 통해 1983년 10만 명이 넘었던 르노의 종업원은 1993년 6만6600명까지 줄어들 정도로 ‘슬림화’됐다.

슈바이처는 르노가 유럽의 수요만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해 1995년 8월 브라질에 진출하고 1996년 6월 제너럴모터스(GM) 유럽법인과 소형 상용차 분야에서 제휴했다. 불필요한 공장이라고 판단한 포르투갈 공장은 1996년 6월 생산을 중단했다. 그는 인재 발굴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으며 회사의 경영권을 틀어쥔 뒤 회사를 재건한 인물, 카를로스 곤의 등장이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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