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애꿎은 죽음의 이름, 희생양

모두의 평화를 위해 선택된 자의 슬픈 운명


공동체가 위기를 맞아 구성원들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거나 좌절감을 느끼게 됐다고 치자. 사건이 전개되면서 구성원들은 아무 관련이 없는 특정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그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기도 한다. 이때 공격을 받는 대상을 ‘희생양(scapegoat)’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왕은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하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테베 왕국에 페스트가 만연하고 권력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패륜을 범한 선대 왕 오이디푸스를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희생양으로 삼아 왕국의 질서를 되찾고 평화를 유지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우리 민간설화 ‘장화홍련전’도 마찬가지다. 후처로 들어온 계모가 자기 소생의 아들을 시켜 전처소생의 이복누이를 살해한다는 패악스러운 이야기의 결말은 권선징악이다. 그러나 당시 공동체 구성원들은 설화를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정식 가족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계모와 소생들이 정식 구성원인양 주제넘게 까불면서 공동체 근간을 흔들면 이 계모처럼 된다. 알아서 기어라!”

‘성경’에서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한다. “너의 외아들 이삭을 모리산에서 제사를 지낼 때 나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일순의 주저함도 없이 이삭을 묶어 제단 위에 눕히고 칼로 죽이려고 했다.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야훼의 말씀을 전한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대대손손 축복을 내리겠노라!”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예뻐서 아버지 야곱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이 요셉이다. 형들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 버린다. 형들은 요셉을 자기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는 불화의 주범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희생양으로 지목해 제거해버림으로써 공동체, 즉 가정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동한말년 이후 한 세기 동안 중국 땅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 와중에 허다한 희생양이 나왔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장수가 전공을 세우려면 수많은 병졸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영웅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일반 백성들이 희생양으로 동원된 것 동서고금의 상식 아닌가.


“왕후! 나 조조를 위해 죽어줘야겠네”
일반 백성뿐이랴. 한나라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보자. 그는 시대를 잘 만났다면 영명한 군주로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의 운명은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 헌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불가항력이었다. 평생을 동탁과 조조 일파의 허수아비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헌제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희생양이다.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동탁·여포·조조 등이 중화사상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간다.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희생양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왕후(王侯)가 아닐까 싶다. 왕후는 조조의 막하에서 식량 배급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조조의 군대가 손책·유비·여포 등의 군대와 연합해 원술의 근거지인 수춘성을 공격할 때의 일이다. 조조의 군대가 17만 명에 육박하는 지라 군량미 소비가 엄청났다. 더구나 원술의 군대는 지구전을 펴면서 일절 싸움에 응하지 않고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어려움에 빠진 조조가 왕후에게 지시했다. “군량미를 배급할 때 예전보다 작은 되를 사용하라.”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떠받든다. 식량 배급에 눈속임이 통할 리 있겠는가. 병사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승상이 먹을 것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고 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자네가 나를 위해 목을 좀 빌려 줘야겠네!” “저는 승상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 “처자식은 잘 돌봐 줄 테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말게.” 조조는 왕후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식량을 빼돌리고 배급량을 줄인 죄로 왕후를 참수했다는 방문을 붙였다. 아울러 “사흘 안에 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모두 참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수춘성은 함락됐다. 희생양이 된 왕후 덕분에 위기를 넘긴 조조 군대가 결국 승리한 것이다.

유비는 관우가 죽고 난 후 양아들 유봉이 관우의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한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미 태자로 옹립된 친아들 유선이 혹시라도 권력투쟁에 휘말려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왕후나 유봉 못지않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양으로 양수가 있다. 양수는 원술의 집안과 견줄만한 명문가였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수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오만해 어디서든지 나서기를 좋아해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전형적인 재승박덕(才勝薄德)형 인사였다.


자기 잘못을 덮는 게 인간의 본성
조조의 군대가 한중 땅을 놓고 유비의 군대와 치열하게 대치 중이던 시절의 얘기다. 하후돈이 물었다. “승상! 오늘 밤의 암호는 뭐로 할까요?” 마침 닭갈비탕을 먹고 있던 조조가 말했다. “계륵(鷄肋), 계륵이다.” 그러자 양수가 갑자기 짐을 꾸리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승상께서 닭갈비란 뜻의 계륵을 암호로 정한 이유는, 한중 땅이 아깝기는 하지만 계륵처럼 실속이 없으니 버리고 떠나자는 뜻입니다.” 양수의 말대로 조조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기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양수의 목을 벴다.


조조는 왕후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식량을 빼돌리고 배급량을 줄인 죄로 왕후를 참수했다는 방문을 붙였다.
아울러 “사흘 안에 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모두 참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수춘성은 함락됐다.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조조가 이를 시기해 양수를 죽였다고 본다. 하지만 실상은 양수가 큰아들 조비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조식의 수하였기에 죽였다고 보는 게 옳다. 이미 조비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기로 한 이상 조식 곁에 양수 같은 재주 많은 자를 남겨 둬 후환이 되게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족. 사람의 본성은 잘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감추고 싶어 한다. 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덮어씌운 후 그를 제거하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줄 안다. 제 마음이 편해질 줄 안다. 지금도 우리는 공동체에 위기가 생기거나 그럴 조짐이 보이면 본능처럼 희생양을 찾아 헤맨다. 우리 안에는 오이디푸스나 왕후나 양수와 같은 애꿎은 희생양을 찾아 헤매는 테베의 시민이나 조조를 닮은 못된 심보가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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