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졔 읽기] 미중일 환율 전쟁 속 손발 묶인 한국
입력 2014-05-23 09:39:56
수정 2014-05-23 09:39:56
G20 서울 회의서 주도한 ‘4% 룰’ 자충수 돼…자국 이익 중심 과감한 대응 필요
올해 초에 이어 한국 경제에 ‘환율 쇼크’가 우려되고 있다. 지난 4월 이후 원화 절상은 주변국의 정책 요인이 강하고 그 어느 때보다 환차익을 겨냥한 핫머니 성격이 짙은 점이 종전과 다른 점이다. 또 미국 달러화뿐만 아니라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 등 주변 3대 경제 강국 통화에 대해 모두 절상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번 원화 강세의 주범으로 꼽히는 외국 자금 유입이 국내 증시의 저평가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글로벌 자금 전환기에 나타나는 특수한 요인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정책을 변경하는 전환기에 국제 간 자금 흐름에서 가장 먼저 고려하는 기준은 확실한 방향이 잡힐 때까지 자금을 넣어 둘 수 있는 ‘피난처(shelter)’ 기능이다.
한국은 자금 피난처로 적합
‘S자형 투자 이론’으로 볼 때 한국은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중간 단계인 준(準)선진국으로 대우받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글로벌 자금의 피난처로 적합한 국가다. Fed가 출구전략 추진을 시사할 때 투자 자금이 이들 국가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지지만 올 3월 Fed 회의 이후 금융 완화 기조가 재확인될 때에는 신흥국으로 자금이 재환류된다.
금융 위기 이후 국제 간 자금 흐름에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특징 중 하나가 순응성이 심해져 쏠림 현상이 정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응성은 환율이 하락할 때에는 더 하락(overshooting)하고 상승할 때에는 더 상승(undershooting)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때문에 환율 등 가격 변수의 변동성이 확대되고 단기적으로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인들에게 환차익을 더 크게 할 소지를 제공한다.
오바마 정부는 집권 2기에 들어서도 달러 약세 정책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 이후 완만한 경기 회복과 올 들어 추진된 테이퍼링(양적 완화 축소)에도 불구하고 달러 평가 지수는 ‘80’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남아 있는 고용 창출 등을 위해 유로화와 신흥국 통화에 대해서는 달러 약세를, 엔화에 대해서는 달러 강세를 용인하는 ‘이원적 전략(two track strategy)’으로 수출 업체들에 대해 가격 경쟁력을 보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재닛 옐런 Fed 의장은 고용을 최우선적으로 창출해 소득과 소비가 함께 늘어나면 성장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경기 우호적인 통화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 나갈 방침이다. 앞으로 Fed의 금융 완화 기조가 지속되면 달러 평가 지수는 현 수준인 ‘80’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베 정부도 발권력을 동원해 엔저를 골자로 한 아베노믹스를 추진한 지 어느덧 1년 4개월이 넘었다. 당초 기대했던 경기 부양과 디플레이션 탈출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2차 아베노믹스’를 추진할 뜻을 거듭 밝히고 있다. 시기적으로 3월 말 회계연도 결산이 끝나자 일본에 유입됐던 외국인 자금과 ‘와타나베 부인’이 주도하는 엔-캐리 자금이 떠나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위험 수준에 도달한 국가 채무를 줄이기 위해 지난 4월 소비세를 인상했다. 하지만 1997년 4월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한 당시에도 성장률을 큰 폭으로 하락시키면서 ‘잃어버린 10년’에 빠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번에도 성장률이 소비세 인상 전후로 1997년 소비세 인상 당시와 비슷한 패턴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2%의 물가 달성을 목표로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는 일본은행은 향후 인플레이션 기대 경로에서 소비자물가가 이탈하면 추가 양적 완화와 엔저 기조 강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 2월 이후 수출 급감에 크게 당혹한 중국 시진핑 정부는 외환 자유화 계획을 일부 앞당겨 추진해 절상 추세가 지속되던 위안화 가치를 절하로 유도하고 있다. 당초 6월에 계획된 하루 환율 변동 폭 확대(±1%→±2%)를 지난 3월 17일로 앞당겨 추진했다. 그동안 추진해 왔던 금리 인상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려운 여건에서는 핫머니 유입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위안화가 절하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화폐가치 절하에 목매는 중심 3국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일본·중국 간의 환율을 놓고 미묘한 갈등 관계가 심해지고 있는 점이다. 집권 2기에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을 추진하는 오바마 정부가 군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아베 정부에 집단적 자위권을 주는 대신 엔저를 묵시적으로 용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진핑 정부는 불가피하게 예상되는 통상 마찰 등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위안화 절하로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흥국 통화가 경제 대국의 정책 요인으로 불리해질 때에는 정책적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부작용이 적지만 한국은 이 점에서는 자충수에 걸려 있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담에서 국제수지 불균형 해소 차원에서 소득 대비 4%를 웃도는 경상 흑자국은 인위적인 평가절하 등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합의했다(‘4%룰’).
하지만 지난해 한국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6%에 달해 곧이어 열린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원화 절상을 막기 위한 시장 개입은 통상 마찰 등을 고사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명분이 약하다. 더욱이 환율 방어를 위해 그동안 외평기금 과다 조달에 따른 부담으로 외환시장 개입 비용이 크게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좀 더 지켜보자’식의 소극적인 자세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미국 등 중심 3국이 자국 통화 약세를 유도하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 따라 마찰 부담도 적다. 글로벌 이익과 자국 이익이 충돌할 때에는 자국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금융 위기 이후 각국의 대외 경제정책 방향이기 때문이다.
원화 절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리 인하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지만 대내외 여건상 여의치 못하면 차선책으로 유입 외자를 사들이는 ‘태환 개입(unsterilized intervention)’이 좋은 대안이다. 최근처럼 물가가 안정돼 있고 국내 자산시장과 체감 경기가 좋지 않은 여건에서는 달러 개입을 통해 풀린 유동성이 부작용보다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토빈세 부과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양적 완화로 풀린 자금 유입의 대처 방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영구적 불태환 개입(PSI)’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PS1는 유입된 외자를 사들이되 풀리는 국내 여신을 흡수하는 것이다. 이때 외자 유·출입에 따른 환율 급등락을 방지해 경제 주체들의 착시와 교란을 방지할 수 있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