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몸 근육이 아닌 정신 근육을 키우자

인류사의 성차별도 바탕 따지고 보면 근육노동 의존 때문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차별은 남녀의 성에 따른 차별일 것이다. 다행히 현대 들어 그 차별은 많이 사라졌다. 적어도 법리적으로나 선언적으로는 평등하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차이’와 ‘차별’은 분명 다르다. 그런데도 차이를 근거로 차별을 정의하려는 모자란 남성들이 존재한다. 이른바 ‘마초’들만 그런 게 아니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에게서도 그런 사고의 편향성이 보인다. 사회학자 거더 러너(Gerda Lerner)는 “차이를 근거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열등감을 주입하고 반복 학습함으로써 차별이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고대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쟁과 노동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근육이 발달한 남성들이 맡을 일이다. 그런데 점차 그 일이 중요해지면서 남성들이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남녀 차별도 생겼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의 창세기에도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남성의 우월성과 우선권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창세기를 남성이 썼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남녀가 함께 창조된 것으로 서술돼 있다.


남녀의 외도는 정말 다를까
중세와 근세에도 근육 의존적 노동 유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인간의 근육노동을 현저하게 줄이면서 여성도 공장에 나가 일할 수 있게 됐고 임금을 벌 수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선 노동과 생활이 완전히 변했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면서 근육노동 의존도가 거의 지워진 것이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여전히 예전의 의식이 남아 있다. 어리석은 남자들의 생각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남자와 여자는 서로 평행선을 달려야 할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과연 지구라는 별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 불일치는 때로는 차이로 때로는 차별이라는 왜곡의 악습으로 나타난다. 일부에선 이런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다. ‘남자는 바람이 나도 가정을 지키지만 여자는 바람이 나면 가정을 버린다’고…. 과연 그럴까. 현상 자체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실체는 분명히 드러난다.

남자는 가정을 소중하게 여겨 외도해도 가정을 버리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이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자신의 가정을 소중히 여기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남자들보다 온갖 열과 성을 다하고 사랑을 쏟아 내는 여자들이 자기 가정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마련이다. 때로는 배우자의 외도를 보고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이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진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경제적인 책무를 담당했다. 여자들에게는 사회적 활동과 경제적 소득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혼한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오해로 자칫 도덕적 비난까지 스스럼없이 가하는 풍토에선 배우자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배우자에게서 존중감이나 만족감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남편에게서 불만족과 불평을 느끼는 게 여자만의 잘못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인식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자도 욕구를 해소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가족이 용서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데도 여성이 정말 가정을 버리고 떠날까. 그렇지 않다. 돌아가고 싶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가정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온 삶을 쏟아 온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현상만 보고 ‘남자는 바람이 나도 가정을 지키고 여자는 바람이 나면 끝내 가정을 버린다’는 평가가 대세다. 사회적 성(gender)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 생물학적 성(sex)의 속성을 몰아세우는 것이야말로 비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 경험주의 전통에 입각한 공리주의자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의 쾌락은 동일하다. 똑같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쾌락을 똑같이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의 그것은 다를까. 남자는 바람이 나도 ‘뻔뻔하게’ 제 방을 차지하지만 여자는 바람이 나면 ‘단호하게’ 자리를 막아버리는 남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지 못해 왔을 뿐이다. 이를 두고 남녀의 심리적 속성 차이라고 떠드는 건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억압과 차별이라는 낡은 틀을 완전히 벗겨내지 못했다. 남녀 간에 생기는 사소한 불평등을 묵인하거나 감수하는 것은 곧 남녀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곧 인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부당한 억압과 편견에 따른 불평등과 맞서 싸워 왔다. 페미니즘 혁명은 단순히 남성의 특권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성별 간의 차이 자체를 없애는 목표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목적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으로 귀결돼야 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사어(死語)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남녀 모두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성차별과 양성 불평등은 분명 가장 오래되고 왜곡된 비겁한 관행이다. 잘못된 것은 하루빨리 고치고 화해해야 한다. 고작해야 근육이 발달해 생긴 근력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근육의 힘에만 의존하려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인간이다. 남자와 여자는 완벽하게 하나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주장은 뒤집으면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날 뿐이다. 그들의 뿌리는 하나다.”

17세기 작가 마리 르 자르 구르네(Marie le Jars Gournay, 1565~1645년)가 1622년에 했던 말이다. 지금은 21세기다. 양성 불평등과 차별 문제의 핵심은 역지사지다. 아직도 양성 불평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 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따지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다. 외려 지금 진짜 중요한 것은 몸의 근육이 아니라 정신의 근육, 마음의 근육이다. 온갖 구실과 핑계를 갖다 붙이는 청맹과니 짓은 빨리 털어내야 한다.

예전에는 일상의 일이라는 게 주로 근육을 사용해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여가 시간에는 피로해진 근육을 쉬게 하는 것이 휴식과 취미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근육운동에 의존한 생활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기계가, 현대에는 전자기기와 컴퓨터가 그 일을 수행한다. 그래서 근육을 사용한 노동은 현저히 줄었다. 그러니 쉬는 때 즐기는 취미라는 게 예전의 음악감상·영화감상·독서·사색 등과 달리 등산·수영·스키·골프·요트·산악자전거 등 위축된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으로 변했다.

자동차가 보편화된 상황에선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간만 나면 멀리 밖으로 나가 여가를 만끽한다. 공원에 가도, 헬스센터나 수영장에 가도 사람들이 넘친다. 이젠 아무 일 없이 집에만 있으면 무슨 큰 손해라도 보는 양 불안할 지경이다. 그야말로 ‘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사람들을 쉬지 못하고 줄곧 밖으로 몰아내는 것인지도 모를 형편이다. 삶에 자극을 주고 휴식을 얻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차분하게 한 주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조용하게 사색하며 가늠하는 게 드물어졌다. 쉬는 게, 휴식이 꼭 그렇게 근육을 적당하게 움직이게 하고 자극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위(無爲)에 가깝게 긴장의 끈을 놓고 정신적으로 넉넉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취미, 그러니까 예전에 그리도 흔하게 대답했던 그 취미들도 적당히 누려야 한다.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정신 근육을 키우지 않으면 도태된다. 20세기는 패스트 무빙(fast moving)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퍼스트 무빙(first moving)의 시대다. 낡은 프레임을 깨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창조니 상상력이니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바탕 위에서 인간의 가치와 기술의 조화를 부단히 추구하며 모두가 협력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게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현재이고 미래다. 그러니 더 이상 불평등과 억압의 감옥에 머무르지 말자.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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