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잊힌 성장 신화…‘개척 DNA’는 살아있다

기획 연재 창조 경제 시대,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②

이병철·구인회·조홍제 배출 지수초, 폐교에 함께 심은 소나무는 여전


연암이 다닌 진주시 지수면 지수초등학교내 연암과 호암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2010.03.24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창업주들은 어떻게 전쟁과 같은 혼란의 정국을 뚫고 황무지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자본·경험·인프라·경험 등 무엇 하나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오늘날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일궈낼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일까. 시계추를 돌려 그들이 자랐고 창업했던 주 무대를 함께 걸어보고 싶었다. 이제는 전설이 된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좇아 창업주들의 고향과 발상지를 찾았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 입구. 이정표를 따라 골목을 걸으니 한옥 솟을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한눈에도 고풍스러운 한옥으로 호암 이병철이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호암이 태어난 1910년부터 열여섯 살 결혼 후 분가하기까지 주요 생활 터전으로 세계관을 형성한 곳이다. 이병철 회장의 조부 문상공은 당시 정곡면·지정면·유곡면 등 세 개 면에 걸쳐 논밭을 두고 있는 동네 제일가는 부자로 1851년 1907㎡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집을 지었다. 호암 생가는 그동안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쳐 2007년부터 외부에 개방하고 있다.

집 안 곳곳엔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한 가문의 가풍이 안채·사랑채·토담 등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웅장하기보다 은은하고 고고한 멋이 살아 있다. 특히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곳은 집 뒤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바위벽으로, 뒷산의 정기를 차단하면서 아늑하게 감싸 안은 형상을 하고 있다. 부를 상징하는 밭 전(田)자가 선명하게 눈에 띈다. 관광객들에게는 ‘복바위’로 불린다. “성스러운 새가 날아들도록 잘 가꾸라. 사람도 성공하기 위해선 열심히 갈고닦아야 한다”고 말하며 벽오동 나무를 즐겨 심었던 어른들의 가르침은 마당에 뿌리를 내렸고 소년 이병철이 공부했던 사랑채 기둥에는 가훈처럼 여기던 추수위신옥위골(秋水爲神玉爲骨:맑은 가을 물을 정신으로 옥을 뼈로 삼다) 사원여해필여연(詞源如海筆如椽:문장은 바다처럼 넓고 글씨는 서까래처럼 웅장하다)이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귀가 여전히 걸려 있다.

이병철 회장은 지주이자 학자인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할아버지의 호를 딴 서당 ‘문산정’이 학교였다. 당시 서당 훈장으로부터 “실력이 부족하다”며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이 회장은 이 시절 유교의 영향을 받았고 ‘논어’를 즐겨 읽었다. 실제로 자서선 ‘호암자전’에서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 철학인 ‘인재제일’, ‘합리추구’, ‘사업보국’ 등이 탄생한 배경에는 이렇듯 사람을 중시한 인본주의 사상과 유교적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암 생가에서 7년째 문화해설사를 맡고 있는 박순선 씨는 특히 학생들에게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곤 한다. “호암 선생님이 살아생전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라고 하지만 이름보다 꿈을 남겨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내가 못하면 후대가 따라간다는 뜻이었는데 반도체가 그랬죠.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꿈이었는데 이건희 회장이 이뤘습니다. 또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남 따라 가지 않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을 기필코 밀고 나가는 도전 정신은 이병철 회장의 일생 그 자체입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이 회장은 반대를 무릅쓰고 쌀 300석을 종잣돈으로 마산에서 정미소를 열며 ‘동네 부자’에서 ‘세계적 재벌’이 되는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의령이 이 회장의 유년 시절 세계관을 형성한 곳이라면 대구는 그의 창업 정신이 꽃피운 도시다. 1938년 3월 대구시 인교동 61의 1에 660㎡(200평) 남짓한 점포를 마련하고 ‘삼성상회’를 열면서 지금의 삼성그룹의 태동을 알렸다. 삼성상회는 대구의 사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다가 제면기와 제분기를 설치해 ‘별표 국수’를 만들어 팔면서 급격히 번창하기 시작했다. 호암은 삼성상회에서 기업가의 임무를 새롭게 깨달으며 삼성의 경영 이념이자 평생 주창한 ‘사업보국’ 정신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이병철 회장의 ‘나의 경영론’ 중 발췌).” 제조업을 해야만 사업보국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설탕을 생산하고 1953년 제일제당을 세웠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변신이었다. 이후 자본을 축적한 삼성은 차츰 소비재 산업에서 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으로 뻗어갈 수 있었다.


불모의 땅 개척가 정신으로 일궈
3월 12일 삼성상회가 있던 자리에 가 봤다. 4층짜리 목조건물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에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대리석에 새겨진 ‘주식회사삼성상회’가 작게나마 발원지를 기념하고 있다. 삼성상회 터 뒤쪽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태어난 곳이자 이병철 회장이 새우잠을 자며 ‘별표국수’ 생산에 매진했던 가정집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일반인이 살고 있는 평범한 가정집인데, 2011년 홍라희 여사가 손자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골목길이라 찾기 쉽지 않지만 집 앞에는 이정표가 서 있어 지나가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삼성상회 터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제일모직 대구공장 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 또한 이병철 회장이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곳이다. 1954년 북구 침산동 일대 24만7000㎡(7만5000여 평)의 부지에 자본금 1억 원을 들여 설립한 모직공장으로 삼성그룹의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 관계사 중 유일하게 대표이사로 재직(1954~1971)한 회사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출발한 제일모직은 대구공장을 비롯해 구미공장·안양공장· 여천공장을 잇따라 세웠으며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이병철 회장의 제일모직에 대한 생각은 ‘호암자전’에 잘 나와 있다. “당시 대개 양복이라고는 미군복을 염색한 것뿐이었고 이른바 마카오 복지는 한 벌에 웬만한 봉급생활자의 월급 석 달분이 넘었다. 외제 못지않은 값싸고 질 좋은 복지를 생산, 국민 모두가 손쉽게 양복을 입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나온 것이 제일모직 건설안이었다.” 이 회장은 국산 양복지의 대명사인 골든텍스를 내놓으며 ‘사업보국’을 실현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이 1956년 대구공장 건설 당시 가장 먼저 완공한 건물은 최신식 여자 기숙사였다. 여사원 대부분이 집이 멀리 떨어진 미혼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미용실·세탁실·다리미실·도서실·정원 등을 갖췄다. 이병철 회장의 ‘인재 제일’ 경영 철학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군”이라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공장 부지 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가꾸고 싶었다는 제일모직 터는 주변의 번화한 아파트 단지와 달리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다소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일 공원’이라고 불릴 만큼 울창했던 느티나무와 오엽송, 감나무와 여자 기숙사를 뒤덮은 푸른 담쟁이덩굴은 이제 녹색 빛을 잃었다. 하지만 여공들이 부지런히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가정경제를 세웠던, 한때 ‘꿈의 직장’으로 불렸던 역사는 소리 없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진주시 지수면 지수초등학교는 기업가 세 명을 한 번에 배출한 곳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LG의 구인회 회장, 효성의 조홍제 회장이 이곳 1회 졸업생인데 한 반에서 공부했다. 학교는 폐교됐지만 세 명이 함께 심었다는 소나무는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미래 개척할 청년들이 꼭 와서 봐야”
지수초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암 구인회 회장이 나고 자란 생가가 있다. 이곳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LG가(家) 사람들은 매년 12월이면 시제를 지내기 위해 이곳에 집결한다. 집안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을 생각하는 자리로 LG의 인화 경영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암은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구재서와 진양 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구연호가 과거 시험에 급제해 홍문관 시독관을 지냈으므로 그의 집은 구교리댁으로 통했다. 한학자 집안답게 실제로 본 연암 생가는 고고하면서도 격이 느껴졌다.



집안에는 연암의 부친인 만회공이 지은 가훈이 걸려 있었다.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껏 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선조에게 제사하는 날에는 반드시 엄숙하고 조심하여라’,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등 10대 덕목이 액자에 걸려 있다. 형제간의 우애와 근면 성실함을 강조한 가통은 집안을 넘어 LG의 인화 경영의 뿌리가 됐다.

한학자 집안에서 기업 경영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연암이 만석꾼 집안의 김해 허씨와 결혼하면서다. 이후 승산마을에서 소비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포목의 유통 경로와 마케팅 기법을 체득하게 됐다. 집안에서는 상업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설득에 성공해 부친으로부터 2000원(圓)의 자금을 받게 됐고 1931년 7월 구인회상점이 문을 열었다. 단순한 물건을 사고파는 포목점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조사해 옷감에 염색을 하거나 수를 놓는 방식으로 4년 만에 진주에서 제일가는 곳으로 키웠다.

이후 지금 LG그룹의 태동인 락희화학공업사(1947년)와 금성사(현 LG전자, 1958년)를 거쳐 지금의 LG그룹을 만든 데는 구인회 회장의 ‘개척가 정신’이 있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에 먼저 뛰어드는 사업가적 기재와 기질이 LG를 만들어 냈다. “이 세상에 여성이 있는 한 영원한 것은 화장품이다”며 시작한 크림 생산이 유리 용기 때문에 이윤이 적자 플라스틱 사업을 펼쳤고 용기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라디오·TV·세탁기 등 전자 제품의 외장을 만들면서 전자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일찍이 피터 드러커는 “기업가 정신의 1등은 한국”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통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인 창업주들에겐 ‘개척 DNA’가 있었다. 불도저 정신으로 황무지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운 것이다.

아산 정주영 회장은 불도저 정신의 대명사로 불린다. “해봤어?”라는 그의 어록은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을 잘 나타낸다. 일례로 현대중공업 탄생에 얽힌 일화는 전설로 남아 있다. 1971년 당시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끌어오기 위해 부지 사진 한 장만 달랑 들고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을 방문, 4300만 달러 자금을 조달했다는 이야기다.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며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이지만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거북선을 만든 민족이다”며 배짱 두둑한 이야기를 건넸고 차관에 이어 그리스에서 유조선까지 수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었던 힘은 ‘근면·열정·도전’으로 요약된다.

안타까운 점은 지금의 현대·삼성·LG·SK 등을 이룩하고 한국 경제 발전을 주도했던 이러한 기업가 정신이 말 그대로 ‘전설’로 남아버린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창업주 생가에서 만난 한 마을 터줏대감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다 보니 진짜 계승해야 할 기업가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오너 정신만 남게 됐어.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기업은 그들만의 성을 쌓고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 청년들은 안정 지향으로 도전을 두려워해. 주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이 찾아오지만 진짜 와야 할 사람들은 바로 기업가들이야.”



연재 순서
1회 기업가 정신의 재발견
2회 전설이 된 한국의 기업가들
3회 기업가 정신의 진화 - 미국편
4회 기업가 정신의 진화 - 독일편
5회 기업가 정신의 진화 - 핀란드편
6회 기업가 정신의 진화 - 이스라엘편
7회 전문가 좌담


의령·진주·대구=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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