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임금 혁명_임금 패러다임이 변한다] 추가 부담 90조…이대론 정년연장 불가능
입력 2014-03-20 17:22:52
수정 2014-03-20 17:22:52
높은 연공임금과 낮은 생산성 괴리, 선진국형 ‘직무급제’가 대안
한국은 1997년, 2008년 두 번의 경제 위기를 겪으며 혹독한 기업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중·장년층은 주된 해고 대상이었다. 이는 생산성과 상관없이 연령에 기준해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급제란 한국 특유의 인사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 한국의 임금 상승률은 현저히 높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생산직 근로자의 근속 연수별 임금 격차(초임 대비 30년 이상)는 한국이 3.3배로 독일(1.97배)·프랑스(1.34배)와 큰 차이를 보였다. 높은 연공성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중·장년층에게 조기 퇴직을 강제했다. 이들이 재취업하려고 해도 각 기업들은 호봉 체계 하에서 높은 임금으로 설정돼 있는 중·장년층의 채용을 기피했다. 결국 중·장년층의 대량 해고 사태는 가계 붕괴, 가족 해체, 노숙자 증가, 중산층 위축 등 한국 사회의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귀결됐다.
생산성은 40대에 최고점
이제 조기 퇴직은 한국 경제의 저성장 국면 진입, 노동 인력의 고령화로 일반 기업에서 만연해 정기적으로 시행될 뿐만 아니라 점점 그 대상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 많은 중·장년층이 현재 취업 규칙상 규정된 정년(약 57세)보다 이른 시기인 평균 53세 정도에 비자발적 혹은 자발적으로 일자리에서 퇴직한다.
직장에서의 생산성은 입사 후 점차 상승해 40대에 최고점에 이른 후 하락하는 것이 보통이다. 임금은 생산성에 비례하는 것이 맞겠지만 생산성대로 임금을 맞춘다면 임금 또한 40대에 정점에 달한 후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40, 50대는 가장으로서 생계비가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봉급이 계속 상승하기를 바란다. 이 같은 욕구를 반영해 연공에 따라 급여가 올라가는 연공형 임금체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연공성이 강한 호봉제는 양날의 칼이 돼 근로자의 장기 고용을 저해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나이별 평균임금 증가율이 1% 포인트 높은 기업일수록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정년 연령이 0.08~0.09년 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연공임금과 생산성 간의 괴리를 완화하기 위한 임금체계의 혁신이 요구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연공급제에 대한 부정적인 효과가 크게 부각되면서 1990년대 말부터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성과주의 인사 제도를 도입해 왔다. 성과 보상 제도, 직급 체계 개선, 발탁 승진제 등 인사 전 분야에 걸쳐 성과주의가 확산됐다. 기업의 보상 시스템은 크게 기본 연봉과 단기 인센티브(집단 성과급제), 장기 인센티브(스톡옵션) 등으로 구성된다. 연봉제를 실시하는 기업의 관리직은 100% 가깝게 연봉제가 적용됐으며 승진의 기준에서 근속 연수가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드는 추세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2006년부터 100인 이상 사업장의 절반 이상이 연봉제를 도입했다. 많은 기업들이 연봉제를 도입했지만 호봉제를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호봉제는 임금체계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고 근속급과 성과급이 병행하는 한국의 독특한 임금체계로 자리 잡았다. 완전 연봉제로 전환되지 않은 배경에는 임금체계 개편에 영향력을 미치는 고위직이 호봉제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배경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 기업의 임금체계는 다시 한 번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맞닥뜨렸다. 당장 코앞에 다가온 정년 60세 연장법(고용상 연령 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 시행, 지난 연말 대법원의 통상임금 확대 판결에 맞춰 올해부터 통상임금에 정기 상여금을 포함하는 등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만일 임금 피크제로의 전환 없이 정년연장이 시행되면 기업 부담액은 최소 90조 원, 그리고 통상임금 산정 범위 확대에 따라 약 14조 원이 추가 부담될 것으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추산했다.
특히 노동 인력의 고령화로 직원들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고령·고위직이 소수였기 때문에 경영 상층부에서 조직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이제 고령 직원 수가 크게 늘면서 모두가 관리자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직원의 고령화와 신규 채용 감소로 과거 피라미드 인력 구조에서 역피라미드 형태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기업 차원에서 국내 기업의 대부분이 연공급제에 기반한 직능급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터라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기업에는 비용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고령화가 향후 지속될 현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연차와 임금의 분리는 절실하다.
임금체계 개혁의 방향은 명료하다.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 근로자들이 기득권에 기대 편안하게 받아오던 연공급을 개선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대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나아가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 근로자들이 연금이 나올 때까지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노사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연공급+연봉제 임금체계의 대안으로 최근 주목받는 것이 직무급제다. 직무급제는 직무의 상대적 가치에 따라 직무 등급을 도출하고 그를 기반으로 기본 급여 수준을 결정하는 임금체계다. 지난 1월 23일 있었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국민경제자문회의·한국노동연구원이 주최하고 고용노동부가 후원한 ‘임금체계 개편 대토론회’에서도 직무급제가 주요 논제 중 하나였다. 유규창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그 일의 가치에 따라 기본 급여가 결정되는 직무급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비정규직·고령화·여성차별·시간선택제 등 산적한 노동시장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채용 시스템도 달라져야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데는 초기에 직무를 구분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하겠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연공급제보다 일 중심의 조직 운영, 우수 인력에 대한 동기부여 등의 측면에서 직무급제로의 전환이 미래에 좀 더 유효한 보상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으로 LG경제연구원은 평가했다. 우리와 비슷한 보상 체계를 갖고 있던 일본의 소니·캐논 등의 기업들도 고령화와 함께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추세다.
일본·독일·미국 등 선진국의 임금체계는 직무급제를 기본으로 한다. 독일은 산별노조나 업종별 노조가 사용자단체와 개별 노동자들의 직무 수행 능력에 기초한 직급 구분, 직급별 임금수준에 대해 협약을 체결한다. 이를 바탕으로 기업 노사는 사업장에 적합한 임금 제도와 직무 관련 규정을 결정한다. 노조는 임금체계 협약을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직무평가 권한을 갖는다. 직무평가를 빌미로 한 사용자들 횡포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한·미·일·독 기업의 채용 시스템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독일 기업은 채용 공고 시 입사 후 맡게 될 업무와 업무 수행에 필요한 자격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에 부합하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직무 능력에 대한 심층 면접을 실시해 직원을 뽑고 있다. 직무급제는 보직 이동 제한, 개인주의적 조직 문화 등의 단점이 있지만 직무 전문성을 갖춘 인재 확보에 유리하고 직무 가치에 따라 임금이 결정돼 임금과 생산성의 괴리가 작다는 장점이 있다.
연공급제에서 직무급제로 바뀌면 기업의 채용 시스템도 획기적으로 전환된다. 국내 기업의 대규모 공채 시스템은 수많은 구직자를 한꺼번에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학력·외국어 성적·학점 등 소위 스펙을 평가할 수밖에 없고 구직자 역시 이에 대비해 실무 능력 강화보다 스펙 쌓기와 필기시험 공부에 집중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스펙 경쟁이 과열된 것이 현재 구직 시장의 현실이다. 직무급제로 전환하면 미국·독일 기업과 같이 채용 시즌을 따로 두지 않고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충원하는 수시 채용이 일반화된다. 직무급제는 스펙 쌓기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기업 차원에서 대규모 공채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고 신입 직원의 업무 능력 향상 효과를 볼 수 있다. 기업과 구직자 모두가 윈-윈할 뿐만 아니라 숙련된 고령 인력까지도 노동시장의 직무 맞춤형으로 채용할 수 있어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