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한 브루투스

공화정 수호 위해 시저 살해했지만 ‘패륜아’ 오명…불멸의 연설로 반전 노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로마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줄리어스 시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저만큼 로마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정치인도 드물 뿐만 아니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웅이자 신화가 된 인물이다. 시저는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민중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아 그를 기반으로 대정치가가 된 인물이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삼두동맹(三頭同盟:제2회 삼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비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를 배경으로 BC 59년에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집정관)에 취임했다. 콘술이 된 그는 국유지 분배 법안 등 각종 법안을 제출, 민중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정책을 펴 대중적 인기를 크게 얻었다. 그것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라이벌 귀족들의 위세를 꺾기 위한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시저는 철저히 자신을 포장해 대중에게 어필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홍보(PR)의 선구자였다.


시저, 민심을 등에 업고 로마를 뒤흔들다
시저는 BC 58년부터 갈리아의 지방 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갈리아 전쟁을 수행했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지만 이것도 진압해 일단 갈리아 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오랜 갈리아 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줬다. 그동안 갈리아의 평정만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 땅을 두 차례 침공했고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을 두 차례 침공했다. 그가 갈리아 전쟁을 끝내기 한 해 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망하자 삼두정치는 붕괴됐다. 원로원 보수파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했고 이에 따라 시저는 정적 폼페이우스와 대립하게 됐다.

결국 그는 로마로 돌아왔다. 밖에서만 돌면 중앙 정치의 역학 관계에서 이탈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야심을 읽어낸 원로원의 결의는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시저는 BC 49년 1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며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해 진격했다. 그것은 일종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시저는 로마에 입성하면서도 철저하게 대중의 지지를 얻어냈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시저는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수스에서 격파했다. 폼페이우스는 패주해 이집트로 갔지만 암살당했다. 시저는 자신의 최대 정적이 살해됨으로써 절대 권력을 독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최고의 예우를 갖췄다. 비록 쇼맨십이긴 했지만 그런 포장지 아량도 시저의 인기를 키우는 데 크게 한몫했다.

이집트 왕위 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 전쟁을치러 승리한 시저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앉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으며 이후 여러 전쟁에서 승리해 내란의 막을 내리게 했다. 시저는 명실상부한 1인 지배자가 됐다. 그는 다양한 사회정책과 개혁 사업을 펼쳤다. 식민지를 확장하고 간척 사업으로 토지를 확장했고 도로를 건설했고 구제 사업도 펼쳐 대중으로부터 지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달력을 새로 정비했다(율리우스력). 그에 맞설 정적은 없었다.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됐으며 ?▤?특권이 주어졌다.

그런 그에게 원로원이 맞섰다. 원로원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전력 때문에 신뢰하지 않은 시저와 로마의 자부심인 공화정을 시저가 파괴할 것이라는 원로원의 불신이 깔렸다.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시저가 종국에는 황제가 되려고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을 내세운 원로원의 시저 살해로 이어졌다. 원로원을 해산하려는 시저의 야망은 공화정을 지키려는 원로원의 저항에 부딪쳐 암살로 끝나게 됐다.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으면서 시저가 자신이 후견하던 브루투스를 보고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외쳤다던가?

대중은 때론 환호하고 지지하면서 동시에 비판하고 불신하는 일이 허다하다. 로마 사람들은 시저에게 매료됐으면서도 그가 황제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대중 가운데 상당수는 시저에게 황제에게 오르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시저가 죽자 당혹감에 빠졌고 자신들의 영웅을 살해한 이들을 규탄했다. 암살되고서도 그렇게 엄중하게 장례가 치러진 사람은 아마도 시저 말고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그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시저의 장례식에서 위기감을 느낀 브루투스는 변명의 연설로 그 상황을 단숨에 바꾸려고 했다.

“끝까지 참고 들어주시오.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사유를 밝히겠습니다. 조용히 하시고 내 말을 들어 주시오. 내 명예를 걸고 말하는 것이니 내 말을 믿어주시오. 이 사람을 믿겠거든 내 명예를 존중해 주시오. 현명하게 날 판단하고 더욱 현명한 판단을 위해 여러분의 이성을 일깨워 주시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시저의 절친한 친구가 있다면 그분에게 말하겠습니다. 시저에 대한 브루투스의 우정도 그분 못지않다고…. 그렇다면 아마 그 친구는 내게 물을 것이오. 브루투스는 왜 시저에게 역모를 했느냐고…. 내 답변은 이렇소이다.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표절’한 셰익스피어
다른 사람도 아닌 양아들이자 피후견인이 양부를 살해했다는 건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시저가 아닌가! 그러나 브루투스는 그것을 역이용했다.

“나는 시저를 사랑했다. 그러나 로마를 더 사랑했다.”
자신보다 시저를 사랑하는 사람은 로마에 없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시저를 죽였다. 패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죽일 수밖에 없었다. 왜? 로마가 더 소중하고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항변이고 변명이었다. 자신은 개인의 영달보다 로마의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의를 선택했다는 표현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브루투스의 그 웅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언변은 성공한 듯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고발이 더 어필했다. 결국 시저를 죽인 브루투스의 패배였다. 결국 투쟁은 명분의 획득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시저의 죽음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저를 사랑했지만 로마를 더 사랑했다는 브루투스의 말은 꽤나 감동적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브루투스의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브루투스가 한 말이 아니다. 시저의 일대기를 희곡으로 만든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작품에서 만들어진 대사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이 유명한 대사를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빌려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사제 관계였으면서도 사상의 내용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스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플라톤을 사랑한다. 그러나 진리를 더 사랑한다.”
아주 절묘하고도 오만하기까지 한 당당함의 표현이다.

아마도 시저가 살해되지 않고 원로원을 해산하고 자신이 황제가 됐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화정을 사랑한다. 그러나 로마 민중을 더 사랑한다!”

대중정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건, 브루투스의 입을 빌린 셰익스피어의 말이건 확실한 것은 모든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장 하나가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문장을 예닐곱 개만 갖고 있어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배우면서, 겪으면서 그런 문장을 길러 내는 힘을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문장 하나가 큰 자산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생각만 하면 금세 포르르 사라진다. 기억을 믿지 말 일이다. 적어야 한다. 그리고 늘 품고 있어야 딱 맞는 상황에 칼을 뽑을 수 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은 ‘적자(write down!)’ 생존이라는 말로 ‘진화’했다던가, 변형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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