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임금 혁명_통상임금 판결, 그 후] 법원·고용노동부 ‘엇박자’…노사 ‘이견’
입력 2014-03-20 17:22:49
수정 2014-03-20 17:22:49
임단협 진통 예상… ‘정기 상여금 범위’ 최대 쟁점
지난해 12월 1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문의 90% 가까이 낭독될 때까지 재계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신의칙) 적용 요건이 선고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며 노동계의 손을 들어주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한 막대한 연장수당 등을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반된다며 과거 3년 치 소급 청구를 제한했기 때문이다.대법원 판결 해석 놓고 시각차 뚜렷
통상임금 이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말 고용노동부가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통상임금 노사 지도 지침’을 내놓았지만 ‘재직 요건’과 ‘신의칙 적용 기간’에서 대법원 판결과 고용노동부 지침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면서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그리고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첫 임금 협상의 계절이 왔다. 봄부터 시작되는 임금 및 단체협상(임단협)을 앞두고 상당수 기업은 인건비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에 맞서 양대 노총에서는 파업 및 소송 등으로 강경책을 준비해 놓고 있다.
통상임금은 각종 수당을 결정하는 기준임금이다. 일종의 ‘레시피’ 같은 것으로 법정 수당을 주기 위해 어떤 재료(임금)를 포함할지 결정하는 개념이다. 통상임금에 어떤 임금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연장·야간·휴일수당 등 각종 수당이 달라진다. 또한 퇴직금도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삼는다.
가장 민감한 부문, 핵심이 되는 요건은 ‘정기 상여금’에 관한 것이다. 가장 많은 부담을 가져오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법원이 ‘상여금은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하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설명하면서 매월 받는 기본급 이외에 두 달, 석 달 등 일정한 기간마다 꼬박꼬박 나오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됐다. 그동안 기업들은 초과 근로에 따른 법정 수당을 산정할 때 기본급을 기준으로 했다면 판결 이후에는 기본급+상여금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지난해 판결에 나온 갑을오토텍은 과거 3년 치 상여금을 포함해 법정 수당으로 시간급 70%가 상승하고 실질임금 인상률은 두 배 넘게 올랐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통상임금 확대에 따른 초과근로수당으로 3조6429억 원의 비용 부담을 예상한 바 있다. 특히 초과 근로가 많은 제조업체가 임금 폭탄을 맞게 됐다.
기업들은 당장 올해 임금 인상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 정기 상여금이 포함되면서 자연스레 임금 상승 효과를 보기 때문에 임금 인상률을 낮추고 싶지만 노조가 이를 받아들일지가 문제다. 일단 노조가 없는 삼성이 비교적 빠르게 임금 상승률을 확정했다. 올해 기본급 상승률은 1.9%로 지난해 5.5%와 비교하면 3.6% 포인트 낮아졌다. 임금 동결을 고민하는 기업도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법정 수당이 늘어나도 4~5년 정도 임금 인상률을 제로로 두면 상쇄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며 “당장 추가 비용 지급 여력과 노조 반대에 부딪칠 수 있다는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통상임금 범위 확대로 제조업의 전체 임금이 2.1% 정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시적인 접근으로 통상임금 판결에 맞춰 임금구조를 바꾸는 곳도 있다. 비교적 단순한 대응으로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항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일례로 ‘재직자에게만 지급한다’는 식으로 재직 요건을 신설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노동부가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주는 경우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다’고 해석하면서 퇴직자에게 지급하지 않는 정기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논리를 얻게 됐다. 이와 함께 ‘일할 지급이어야 통상임금’이라는 판결 내용에 맞춰 일할 지급 조건을 삭제하거나 정리하는 식으로 통상임금성을 제외하는 것도 현재 많은 기업에서 논의되고 있는 대응 방법이다. 예를 들어 상여금을 지급일 며칠 전 퇴직자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방법은 아직 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노동조합 혹은 재직자 과반수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과제에 부닥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취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현재 적지 않은 기업들이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밖에 조건부 정기 상여금, 장기적으로 상여금 축소 등 여러 방식으로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고민을 하고 있다.
양대 노총(한국노동조합총연맹·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최근 기업들의 움직임에 대비해 ‘통상임금 대응 방법’을 회원사에 안내하고 있다. 조목조목 예를 들어 계약서에 쉽게 사인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지난해 통상임금 판결 이후 사실상 주도권은 노동계가 쥐고 있는 상태다. 임단협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는 가운데 최대 쟁점은 역시 ‘통상임금 범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앞서 설명한 ‘재직자’ 기준을 놓고 노사 간 팽팽한 줄다리기 싸움이 예상된다. 기영석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노조와 협상을 통해 합의할 때 장기적인 관점에서 패키지 딜을 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초기 재무적 부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감축하는 형태로 사내 복지 기금 등 통상임금에 비견하는 실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딜을 제안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설득과 홍보 노력이 있어야 혹시 모를 소송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패키지 딜로 설득해야
이와 함께 임금체계 개편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 비해 한국에서 통상임금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 기형적인 임금체계 때문이다. 그간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기본급을 적게 올리고 각종 수당을 신설해 임금구조가 너무 복잡해졌다는 게 문제다. 갖가지 수당을 일원화하고 단순화하면서 연봉제·성과급제·직무급제 등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기업 인사팀과 법무팀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통상임금과 함께 이와 맞물려 있는 정년 연장 이슈, 근로시간 제한 등 인건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어 임금 개편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없다는 판단인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노사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 임금 개편을 추진하는 기업은 생산성과 성과와 연동되는 방향을 선호하지만 노조는 크게 반발하는 상황이다. 기영석 변호사는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회사를 보면 제로섬을 하지 않았다”고 조언했다. “호봉제로 100억 원이었다면 연봉제는 110억 원 정도로 전체 임금 풀을 늘려 대부분이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하면 저항이 적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합의를 통해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국 소송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 기업들에 관련 컨설팅을 하고 있는 법무법인 화우 오태환 변호사는 통상임금 대응책으로 먼저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과 인정되지 않는 항목으로 나눈 후 과거와 미래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태환 변호사는 “노사 교섭, 임금체계 개편, 관련 규정의 정비, 근로시간의 정비, 직원들에 대한 설득 등 다양한 방법 중 최적화 방안을 택해야 한다”며 “방법론뿐만 아니라 자문과 컨설팅, 소송비용 마련과 기업 내외적인 태스크포스(TF)팀의 구성,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등의 계산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통상임금 이슈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문제가 모든 기업에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 상승 20% 이상의 심각한 타격을 입는 곳은 일부 수출 대기업이다.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에 따르면 100인 이상 사업장 100개 중 4곳만 20% 이상 임금이 상승하며 기업 전체로 보면 1~2% 선에 그친다. 통상임금을 무기 삼아 임단협에서 승기를 잡으려는 시도 및 꼼수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오태환 변호사는 "임금 때문에 공장이 가동을 멈추는 등 분쟁으로 상반기 내내 비용과 시간을 쓰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손해”라며 한 발씩 양보하는 대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