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 리뷰] 아무도 몰랐던 ‘을’의 성장 비밀

전략 경영 저널 최근호 논문 ‘공급하며 학습하기’

Based on “Learning by Supplying” by Juan Alcacer, Joanne Oxley (2014, Strategic Marketing Journal, 35(2), pp. 204~223)


연구 목적
기업 내부에서 진행되는 활동을 기업 외부의 제삼자에게 위탁하는 ‘아웃소싱’을 말할 때 갑과 을의 관계가 거론되곤 한다. 최근 갑을 관계에서의 상생이 강조되면서 갑을 관계가 재조명 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을이 입었던 다양한 피해 사례도 불거져 나온다. 그러면 갑을 관계에서 을의 대다수는 피해자일까. 을로 존재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지는 않을까.

을이 갑에 납품하면서 취할 수 있는 이점을 연구한 논문이 최근 발간됐다. 을 업체가 갑 기업에 공급·납품하면서 특히 ‘배울 수 있다’는 부분을 강조한 논문이다. 후안 알카세르 미국 하버드대 교수와 조앤 옥슬리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전략 경영 저널(Strategic Marketing Journal) 최근호에 ‘공급하며 학습하기’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아웃소싱으로 위탁을 받아 기업에 납품하는 공급자(Supplier:협력업체)가 위탁 생산 과정에서 ‘학습’할 수 있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연구 대상
아웃소싱이라는 개념이 도입됐던 과거에는 특정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 중 일부 부품 정도를 외부에 맡기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이제는 아웃소싱을 단순 위탁으로 치부하는 시대는 지났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공급자가 차지하는 역할은 지속적으로 증대됐다. 가령 2000년대의 가전 기업들의 제품 생산 과정에서 아웃소싱이 차지하는 비중이 75%를 넘어섰다는 자료를 이 논문의 연구진이 인용하기도 했다.

아웃소싱이 고도화되면서 위탁 받은 공급 업체가 역량을 키워 유수 기업으로 도약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그 예로 1975년에 설립된 대만의 전자 업체 인벤텍(Inventec)을 들었다. 인벤텍은 일찌감치 휴렛팩커드(HP) 등 글로벌 대기업에 납품하는 모델을 제조하는 전략을 택했다. 전 세계의 여러 생산 업체에서 각종 부품을 공급받아 이를 조립해 낮은 가격에 글로벌 대기업에 납품해 왔다. 그러던 중 인벤텍은 최근 대만과 중국에서 인벤텍 고유의 자체 브랜드를 지닌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납품 업체로 시작한 인벤텍은 오늘날 노트북·서버 등을 판매하는 대만의 간판 정보기술(IT)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 논문은 인벤텍의 사례처럼 특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즉 주문자인 기업이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위탁 받아 공급하는 업체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학습 효과에 초점을 맞췄다.


연구 방법
이 논문의 저자들은 공급하며 학습해 나간 기업의 이력을 확보, 연구하는 방법을 택했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의 이동통신 산업에 속한 기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기업 중 단순 납품 업체에서 향후 자사의 고유 브랜드를 갖춘 혁신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를 추출, 그 과정을 분석했다. 저자들은 ‘공급 업체가 기술을 축적하고 역량을 높이는 데 필요한 요인은 무엇인가’, ‘공급 업체가 납품하는 기업(갑의 기업)이 어떤 기업인지가 중요한가’, ‘공급 업체가 학습하기 위해서는 공급 업체가 상품 디자인에 관여하는 것이 중요한가, 또는 상품 제조에 관여하는 것이 중요한가’ 등의 질문에 초점을 맞췄다.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납품 업체가 공급하면서 배우는 부분을 결과로 도출했다.



연구 결과
공급 업체는 해당 산업에서 공급 활동을 진행한 기간이 길수록 그 역량을 높여나갈 수 있었다. 또한 공급 업체가 납품한 대상 기업, 이른바 ‘갑’ 기업이 양질의 기술 등 우수한 능력을 지닌 기업일수록 공급 업체의 역량 또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공급 업체는 단순 OEM 과정보다 제조자개발생산(ODM) 과정 속에서 보다 더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ODM 방식으로는 설계·개발 능력을 갖춘 제조업체가 유통망을 확보한 기업에 제품을 공급한다. 그 과정에서 제조업체는 단순 생산을 넘어 개발력을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에 ODM 방식이 OEM 방식보다 납품 업체의 역량 개발에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이 논문의 연구진은 공급 업체가 납품 활동을 하면서 자사의 역량을 고도화한다는 근거로, 글로벌 PC 기업 에이서(Acer)의 창업자인 스탠 시(Stan Shih)가 고안한 ‘스마일 커브(Smiling Curve)’를 언급했다.

스마일 커브는 상품 개발에서부터 마케팅·애프터서비스 등으로 이어지는 가치 사슬에서 단계별 부가가치를 나타낸 곡선이다. 대만 출신의 스탠 시 자신이 미국 등 글로벌 PC 회사에 OEM 방식으로 PC를 납품하면서 경험한 부분을 이론화했다. 스탠 시는 자신이 경영하는 에이서와 같은 납품 회사가 PC를 공급하기까지 실질적인 생산 업무를 맡지만 정작 높은 부가가치를 올리는 주체는 납품하는 공급 업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은 자신의 회사가 납품한 PC에 글로벌 유명 브랜드를 달아 판매하는 글로벌 기업이었던 것이다. 대형 글로벌 기업 중 제품의 연구·개발(R&D), 브랜드 구축, 유통을 직접 수행하고 제조 자체는 낮은 가격으로 아웃소싱을 주는 곳이 적지 않다. 즉, 스마일 커브는 가치 사슬의 각 단계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의 정도를 선으로 이어보면 양쪽 끝인 R&D·마케팅 등의 부분이 올라가고 가운데에 위치한 제조 부분이 가장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 웃는(스마일) 입의 모양이 된다는 이론이다.

스탠 시 창업자는 이 같은 사실을 공급하며 ‘학습’했다. 납품 업체의 창업자로서 공급의 과정 속에서 배우고 터득해 고부가가치의 창출 영역을 간파한 것이다. 그 뒤 스탠 시 창업자는 글로벌 기업들에 제품을 납품하는 과거의 에이서가 탈바꿈하도록 진두지휘했다. 새로운 경쟁 우위와 가치를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스마일 커브의 양 끝에 있는 기획력·R&D·마케팅 등을 에이서의 주요 역량으로 키워 내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과거 무명 기업에 가까웠던 에이서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사점
공급 업체는 납품하는 과정에서 ‘학습 효과’를 누려 스마일 커브의 양 끝 부분의 고부가가치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마일 커브는 20세기 산업화 시대와 21세기 지식 기반 경제의 차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과거 20세기 산업화 시대에는 산업이나 기업의 가치 사슬의 가운데에 위치한 제조가 이익 창출의 중요한 단계였다. 거대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생산 설비를 갖추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며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생산원가를 줄이는 제조 단계에 많은 역량이 집중됐다. 포드 자동차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컨베이어벨트에 있던 것처럼 생산량과 작업 효율이 개선되면서 원가가 절감됐고 결과적으로 수익 증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21세기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가치 사슬의 앞 단인 혁신적인 기술력과 브랜드의 프리미엄, 뒷단의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 고객 맞춤형 서비스 등이 높은 수준의 부가가치와 이익을 창출하는 U자 모양의 스마일 커브를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폰은 미국의 애플이 제품 연구·개발·마케팅을 담당한다. 한국·일본 기업 등이 애플에 핵심 부품을 제공하고 팍스콘과 같은 대만계 기업이 아이폰을 조립하는 구조를 이룬다. 리서치 업체 아이서플라이가 아이폰의 원가 구조를 분석한 결과 아이폰의 제조원가는 2%에 불과한 반면 제품 마진은 51%에 달했다.

스마일 커브의 고부가가치 영역에 집중한 성공 사례를 애플이 보여주듯이 납품 업체는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경주를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납품 업체로부터 공급받는 대기업의 역량 수준이 납품 업체의 경쟁력 강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 논문의 결과에도 예의주시해야 한다.


이효정 삼정KPMG 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hyojunglee@kr.kpm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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