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작은 영화관’의 이유 있는 반란

입소문 타고 주말 매진 행진…뚜렷한 개성으로 중년층 사로잡아

연간 관객 2억 명 시대, 한국의 영화 산업은 최대 호황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5000만 국민 1인당 평균 네 번씩 극장을 찾은 셈이다. 음악·미술·무용 등 여러 문화 장르 중 단연 인기를 누린다. 동네마다 자리 잡은 멀티플렉스가 특수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화려한 멀티플렉스 반대편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이 있다. 특별한 홍보 없이도 멀리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주로 예술 영화, 독립 영화를 상영하는 일명 ‘작은 영화관’이다. 잔잔하게 주목받는 작은 영화관을 집중 조명했다.



한국 영화 산업은 지난해 기록을 세웠다. 관객 2억1332만 명, 매출 1조8900억 원으로 사상 최고다. 1만 원 이내로 할 수 있는 문화생활로 영화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국 극장의 83.5%는 멀티플렉스다.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인 CJ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가 호황의 과실을 챙기는 가운데 소규모 단관으로 팬층을 늘리는 곳이 있다. 예술 영화관, 독립 영화관 혹은 다양성 영화관으로 불리는 ‘작은 영화관’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우며 또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좌석 점유율로 보면 요즘 가장 잘나가는 극장이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지하에 있는 씨네큐브의 평균 좌석 점유율은 35%다. 멀티플렉스 선두 주자인 CGV 전체 평균 점유율인 25%보다 높다. 씨네큐브 매표소에선 예약 없이 왔다가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월 25일 늦은 오후 매표소 직원은 “오늘 하루만 세 번이 매진됐고 주말은 대부분 매진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씨네큐브 관객 수는 2011년 전년 대비 40% 늘었고 2012년 다시 18% 늘어나 26만 명으로 최다 관객을 기록했다. 2013년엔 25만 명이 들었다.

경사는 또 있다. 씨네큐브가 수입 배급한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말 개봉해 누적 관객 12만 명을 돌파했다. 언뜻 보면 대수롭지 않은 수치일 수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꿈의 수치’다. 예술 영화에서 10만 관객 돌파를 상업영화의 1000만 관객에 견준다. 그런데 2000년에 개관한 이후 지난해 ‘마지막 4중주’가 11만 명 관객 기록을 낸 데 이어 반 년 만에 연이어 최다 관객 수를 돌파했다.

특정 극장을 넘어 전국에서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뿐만 아니라 코엔 형제의 음악 이야기를 담은 ‘인사이드 르윈(9만7081명)’이 1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4만3060명)’,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 살아남는다(3만3587명)’ 등 현재 흥행몰이를 하는 개봉작들이 적지 않다. 조용한 반란으로 불릴 정도다.

이런 영화를 문화체육관광부와 영화진흥위에서는 ‘다양성 영화'로 부른다. 시장점유율 1% 이내 국적과 장르의 영화로, 흔히 상업영화 및 주류 영화가 아닌 모든 영화를 의미한다. 업계에서는 구분하는 기준이 조금 다른데, 예술 영화나 독립 영화 등으로 부른다. 해외에서 ‘아트하우스’로 불리는 예술 영화 전용관의 한국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같은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더라도 멀티플렉스에서는 ‘겨울 왕국’에 주목한다면 작은 영화관에서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이라는 유럽 동화를 내건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흥행’과 거리가 멀고 지향점도 다르다. 그런데 최근 2~3년 사이 잔잔한 돌풍이 일어나고 있다. 2012년 흥행작이 입소문을 타며 관객을 모으고 있는 것. 인기 요인은 다양하다. 우선 중년 관객 파워를 꼽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영화를 보는 주 관객층은 20, 30대 젊은 세대지만 최근 40, 50대 중년층이 파워 관객으로 부상하고 있다. 씨네큐브는 관객 연령대 분포도가 20대 24%, 30대 39%, 40대 18%, 50대 15%, 60대 4%순이다. 40~60대 관객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관객층이다. 특히 극장 회원으로 등록한 열혈 관객 190명 중 절반 이상인 98명이 40대 이상 여성이며 남녀 통틀어 50대 관객이 55명, 29%로 가장 많다.



독특한 감성이 있는 ‘공간 마케팅’
씨네큐브에서 영화 사업을 담당하는 박지예 팀장은 “2000년 개관 때부터 꾸준히 영화를 찾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령대가 높아진 점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전과 달리 영화에 특별한 취미가 없는 관객들도 새롭게 유입되고 있다. 작은 영화관을 ‘조용한 중년들의 놀이터’로 생각해서다. 영화관에서 만난 김소이(51) 씨는 “멀티플렉스관과 달리 여기서는 젊은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조용하고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 좋다”며 “모임을 영화관에서 갖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싶을 때면 퇴근길에 들르곤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영화에 대한 특별한 취향이나 견해는 없다. 하지만 그는 “작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감동이 있어 믿고 보는 편”이라고 했다.

작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 함께 영화를 보고 삶에 대해 대화를 하기에도 좋다.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장년층, 특히 은퇴 전후 세대들이 평일 낮에 호젓하게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중년 관객들이 선호해 최근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노년의 사랑을 다룬 ‘아무르’, 은퇴 음악인들의 이야기 ‘마지막 4중주’, 아버지의 부성을 다루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이 있다.

영화관의 공간 마케팅도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 공간에 머무르는 것 자체로 예술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작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특징이다. 김 씨는 “공간 안에 있는 나를 본다”고 했다. 매주 화요일마다 이수역 근처 아트나인으로 독립 영화를 보러 온다는 이다겸(26) 씨는 “독립영화를 보기 위해 잠실에서 매주 찾아오고 있는데 좌석 수가 58석밖에 되지 않아 매진될까봐 매번 서두른다”며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이끌어 가는 감독의 상상력과 예술성에 매료된다”고 말했다. 아트나인은 한쪽에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을 들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뒀다. 씨네큐브는 미술 작품을 설치해 놓고 있으며 씨네코드 선재는 아트선재미술관 안에 자리해 영화와 함께 전시를 볼 수 있다. 아트하우스 모모는 책을 비치해 놓고 있으며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는 로비에 만화책이 즐비하다. 특별한 공간에서 ‘영화’를 넘어 ‘문화’ 그 자체를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게 작은 영화관이 사는 법이다. 박지예 팀장은 “호젓하고 조용한 평일에 와서 영화를 보고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게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점심 전후 시간대 영화가 가장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아트나인은 아예 극장 안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한국에 작은 영화관이 생긴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백두대간이 해외에서 예술 영화를 수입하면서 전용 극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숭씨네마텍이 1호점으로 문을 열어 백두대간이 위탁 경영했고 이후 종로의 코아아트홀과 씨네코아 등이 생겼다. 흥망성쇠를 거듭한 끝에 현재 전국에는 40여 개 영화관이 있다. 다양성 영화관 리스트는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www.artpluscn.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트나인, 극장 안에 레스토랑 열기도
서울 시내 작은 영화관은 10여 개로 압축된다. 씨네큐브는 태광그룹에 의해 설립돼 백두대간이 위탁 경영해 왔지만 2009년부터 태광그룹이 자체적으로 티캐스트를 통해 운영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자체 극장인 아트하우스 모모를 열었다. 마침 이화여대에서 예술 영화관 오픈을 제안해 왔고 2008년 문을 열어 대표적인 예술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백두대간의 이광모 사장은 한국에 처음 예술 영화를 수입한 주역으로,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줄곧 백두대간을 지키고 있다. 아트나인은 서울 남산 자동차극장, 메가박스 이수·이채 등을 운영하는 정상진 엣나잇필름 대표가 지난해 설립한 예술 영화관으로, 서울 사당동 이수역 인근에 지난해 1월 문을 열었다. 강남권 첫 예술 영화 전용관으로 ‘하이엔드 스피커’와 ‘귀로 듣는 영화’가 강점이다. 씨네코드 선재는 영화사 진진의 김난숙 대표가 이끄는 곳이다. 현재 작은 영화관을 운영하는 운영 주체는 크게 정부·기업·개인 등 세 축으로 나눌 수 있다. 씨네큐브는 기업, 아트하우스 모모나 씨네코드 선재 등은 개인, 신사역의 아트플러스, 성북구의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 등은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곳들이다. 주로 강북, 특히 종로구 일대에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화관마다 예년에 비해 어려운 작품이 줄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초기에는 고전 혹은 하드코어 예술 영화를 선보였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작품성이 있으면서도 너무 난해하지 않고 잔잔한 감동이 있는 영화가 많아졌다. 하지만 자칫 블로그 감상평이나 포스터와 다르게 깜짝 놀랄 만한 영화를 접할 수도 있다. 최낙용 백두대간 부사장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불편한 영화, 스토리를 알 수 없고 아무 정서적 감동이 없는 영화들도 상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스토리의 기승전결이 없지만 영화적 언어에서 보면 독특한 완성도와 운율이 있는 영화들이다. 최 부사장은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무엇에 대한 영화인지 질문하게 하는 영화, 오리무중 속에서 ‘이게 뭐야’라고 질문하게 하는 영화가 예술이 추구하는 의미이고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례로 최근 개봉된 ‘메콩호텔’은 일반적으로 편집에서 쉽게 잘리거나 쓰지 않을 장면들을 길게 보여주고 있다. 손잡는 장면이 3분 정도 클로즈업된다. 이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서 항의하는 고객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 영화를 왜 트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죠. 하지만 똑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새로운 시도가 놀랍다, 경의를 표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 온라인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큰 홍보비용을 쓸 수 없는 극장 측에서도 이와 같은 SNS는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관들의 수익성은 어느 정도일까. 관객이 몰리면서 수익도 대박이 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화려해 보이지만 장밋빛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극장 자체가 작기 때문이다. 상영관이 많은 멀티플렉스라면 영화 하나가 잘나가면 수익도 늘어나지만 보통 평균 100여 석, 1~2관을 운영하는 작은 극장들은 관객이 늘어나도 한계가 있다. 씨네큐브가 지난해 25만 명으로 가장 좋은 기록을 냈지만, 매년 20%씩 성장해도 30만 관객을 돌파하기 어려운 구조다. 또한 10만을 돌파하는 영화들이 속속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1만~2만 관객에 못 미치는 더 많은 영화들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극장을 잡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시간대에 하루 2~3회 배정되고 있다.



백두대간이 처음 예술 영화 시장 개척
수익구조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다. 우선 극장에서의 매출액은 기본적으로 티켓 값과 관객을 곱한 값이다. 멀티플렉스라면 매점 매출과 광고가 티켓 매출을 넘어서는 중요한 수익구조다. 하지만 작은 영화관들은 기본적으로 광고가 없고 음식 반입을 금하고 있다. 멀티플렉스가 티켓 매출이 40~50% 정도라면 작은 영화관은 거의 100% 티켓 매출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티켓 매출은 영화진흥위원회와 부가세를 제하고 보통 50 대 50으로 배급사와 극장이 나눠 갖는다.

평균 8000원으로 단순 계산했을 때 아트하우스 모모는 연간 10만 명 관객이 들어 3억2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물론 해마다 10%씩 상향 추세이지만 극장 운영만으로 임차료와 인건비 등 운영비를 보전하기 어려운 구조다. 서울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지방은 상황이 더 어렵다. 광주의 광주극장, 부산의 국도가람예술관, 대구의 동성아트홀, 대전의 아트시네마,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 등이 있지만 어렵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입 배급 비즈니스가 성장 동력으로 꼽힌다. 대부분이 극장 사업과 함께 수입 배급을 겸하고 있다. 극장 색깔에 맞는 영화를 직접 선택하면서 부족한 수익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극장 상영관은 늘릴 수 없지만 수입 배급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작은 영화관에 부는 10만 관객 돌풍은 단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장기적인 추세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보통 수입 배급에서 영화 한 편 당 1만~2만 관객이 들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이미 성공 사례도 많다. 백두대간이 수입 배급한 ‘피나’는 3D 영화로 극장을 넘어 공연장에까지 배급했으며 최근 인기에 힘입어 3월 중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원스’와 같이 예술 영화에서 시작해 멀리플렉스까지 확대된 사례도 있다.

재밌는 점은 수치적 성장을 무조건 환영하지는 않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산술적인 경제 효과보다 무형적 가치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10만 관객보다 2만~3만의 ‘중박’영화가 더 많이 나오는 시나리오를 업계에서는 더 기다리고 있다. 성장의 딜레마 때문이다. 멀티플렉스와 마찬가지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상영관의 한계 때문에 영화 한 편이 흥행했을 때 모두가 같은 영화를 상영하면 그만큼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영화들이 많아지는 결론에 이른다. 정작 본래 취지에 맞지 않게 작은 영화들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또한 극장별 특성이 사라질 때 결국 시장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1980년대 미니 시어터 붐이 시부야를 중심으로 크게 일었지만 2000년대 들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일본 유학을 하며 실제로 눈앞에서 상황을 지켜본 주희 엣나잇필름 이사는 “예술 영화와 일반 영화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극장들이 축소되거나 없어졌다”며 “궁극적으로는 극장별 프로그램이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은 영화관의 특징은 ‘한 번 발을 내디딘 관객은 충성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최낙용 부사장은 “지금까지 규모를 늘리기보다 우리의 색깔과 스탠스를 잃지 않으면서 신중히 접근한 게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며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대중과의 교감을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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