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지도, 그 안에 숨은 정치와 권력의 욕망

선망에서 비하의 대상으로 전락한 오리엔트…확고불변한 ‘방향’은 없어

오리엔트(Orient)는 인도의 인더스강 서쪽에서 지중해 연안까지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엄밀하게 말하면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중해 동쪽의 여러 나라, 더 넓게는 동양을 가리킨다. 라틴어 오리엔스(Oriens)에서 온 말로 ‘해가 뜨는 방향’ 혹은 ‘동방’을 뜻한다. 물론 로마인들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동쪽을 오리엔트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수입해 문물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오리엔트라는 말은 분명 선망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고대 문명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비슷한 위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이는 농작물이나 가축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위도가 비슷하면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가 쉽다. 예를 들어 남미는 위도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에 라마 외에 가축화된 동물이 거의 없다. 유럽인들이 타고 온 말을 보고 놀랐던 것도 중남미 제국과 문명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이런 점에서 유럽은 오리엔트의 곁에서 비슷한 위도의 혜택을 한껏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의 힘이 근대 이후 강해지면서 동양은 식민지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함께 제국주의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을 통해 동양적인 것, 즉 오리엔탈은 하대의 대상이 돼버렸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그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문화 체계 안에는 무수한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들이 살아있다. 너무나 만연한 나머지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발로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다.

모든 문명은 방향 혹은 방위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졌다. 고대 중국의 철학서인 ‘주역(周易)’은 방향을 8괘 혹은 64괘 등으로 표현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주역의 해설서인 ‘계사상전(周易 繫辭上傳)’에도 방향이 길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농경문화가 시작되기 전 인류의 조상들은 숲속에 살면서 과일처럼 따먹을 수 있는 것을 먹고 짐승들을 잡으러 다니며 살았다. 구석기 시대의 인간들은 완전히 자연 안에 살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숲에 악령이나 무서운 짐승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안전한 동굴을 찾아 제 집으로 삼은 이유다. 영어의 셀터(shelter)라는 말이 ‘피난처’라는 뜻을 가장 앞에 담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시간이 지나자 채집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옮겨왔다. 숲에서 나온 사람들은 토지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나무나 푸성귀들을 심어 가꾸며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숲은 악령과 짐승이 사는 무서운 곳이었다.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정원’을 생각해 보자. 울타리로 에워싼 정원은 숲의 위험에서는 벗어난,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혜택, 즉 안심과 평온과 행복을 주는 곳이 됐다. 정원은 악령이 아니라 자기를 지켜주는 신들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의미로 정원을 ‘낙원(paradeisos)’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어원은 페르시아 말로 ‘에워싼 땅’이다.


에덴동산은 동쪽에, 피라미드는 서쪽에?
인류 최초의 낙원은 바로 ‘에덴동산’이다. 그런데 에덴은 ‘동쪽’에 있다.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사실 에덴은 실재한 공간이라기보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약속한 행복의 상징’에 가깝다. 많은 학자들은 유프라테스강 동쪽 우르 근처쯤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강의 동쪽이라는 얘기다. 수많은 문명권에서 해가 뜨는 동쪽은 길하고 좋은 곳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반대로 서쪽을 중하게 여기는 문화도 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정토(西方淨土)’는 문자 그대로 서쪽에 있다. 불교의 원류에서도 그렇게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 본다면 불교는 서쪽으로부터 전해져 온 종교다. 이에 따라 부처님이 있는 곳이 서쪽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서쪽을 중요시하는 건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다. 하루해가 삶을 마치고 돌아가 쉬는 곳, 그리고 다음날 다시 뜨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서쪽이다. 이 때문에 이승에서의 목숨을 마치고 다시 환생하기 위해 서쪽에 무덤을 삼았던 것이다.

유럽의 중세 지도를 보면 특이한 점이 보인다. 동쪽이 맨 위에 있다. 8~15세기에 일반화됐던 이른바 ‘T-O지도’에는 분명 아시아 대륙이 지도의 위쪽에 있고 유럽과 아프리카는 그 아래에 있다. 바로 에덴동산 때문이다. 세상의 시원인 그곳을 가장 위에 두는 건 물론 종교적인 이유에서다. 실제로 이 지도는 둥글고(O), 아래쪽의 수직 반경과 직각인(T) 수평적 직경을 갖고 있다. ‘T’는 ‘타우’라고 알려진 십자가 형태였으며 따라서 이 지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지도 중앙에는 예루살렘이 있었고 대륙은 삼위일체를 의미했다.


누구의 눈으로 방향을 바라보는가
비단 서양만 그런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천하’라는 개념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각형 틀 안에 세상을 배열했다. 실제로 중국이라는 말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중화민국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신해혁명 이후다. 중국은 세상의 복판, 그리고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일종의 문화적 용어다. 이처럼 신성한 성경과 지리학의 통합이나 천자를 중심으로 중화와 야만을 네 방향으로 배열한 중국인의 심리적 투영은 비교적 덜 객관적인 현실을 해석할 때 미치는 문화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근대 이후의 지도 제작 과정에선 이러한 시각이 완전히 벗겨진다. 이후로 지도는 늘 북반구가 위에 있고 남반구는 아래에 있다. 이런 지도를 뒤집어 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유럽은 지도 상단에, 아프리카는 지도 하단에 표시된 것은 지도 제작자나 국가의 가치관이 철저하게 투영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도에는 그 문명의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시각적 요소와 개념적 요소가 명백히 존재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지도는 서양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형성하는 권력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다행히(?) 북반구에 있는 까닭에 별 저항감이 없지만 지도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런 시각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지리학적인 지도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공간 개념을 반영하기에 지도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 개인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중재자이며 세계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묘사하는 것을 보는 경향이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지도의 제작에서 방향의 설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아서 제이 클링호퍼는 ‘지도와 권력’에서 “지도에는 언제나 주관적인 인식이 들어가 있다”며 “한 개인의 세계관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하며 문화적인 제약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미국 출판물용 지도를 만든 존 해리슨은 지도를 만드는 일이 미국의 전투 행위 중 일부라고 믿었다.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학적 지식이 필수라고 믿었는데, 그의 지도는 도발적이고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간섭주의를 지지, 미국이 지리적으로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점을 지도상에서 표현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을 모색했다.

어디 단순히 지도상의 문제일까. 수많은 공간 기준의 설정과 배열 그리고 그에 대한 부지불식의 의도와 해석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가끔은 세계지도를 거꾸로 걸어 놓고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스튜어트 맥아더의 ‘수정본 세계지도’가 좋은 예다. 1979년 호주에서 출판된 이 지도는 ‘남반구는 더 이상 노고도 인정받지 못하고 북반구를 어깨에 짊어진 채 비천함의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것’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방향은 확고하게 불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방향조차 사실은 사람들이 설정하고 해석한 것이며 거기에 담아둔 의미는 권력이나 부와 대단히 밀접하다. 이러한 고정성이 우리의 시각조차 마비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 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어떤 점을 중심으로 삼고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지 절대적 상징이나 가치를 지닌 게 아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기존의 시선에 판단을 고정한 채 해석하는 습관이 오래도록 몸에 배어 있다. 게다가 우리는 다른 시선을 통해 우리를 보는 데에 익숙하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밖의 요인만 따지고 재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걸어둔 지도에서 감춰진 의도를 읽어 내고 가끔은 뒤집어 보기도 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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