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공 나선 녹십자 숨 고르기…피델리티·이금기 회장의 캐스팅보트 향방은
매출 기준 제약 업계 2위사인 녹십자(약 8800억 원)와 7위사인 일동제약(약 3700억 원) 간의 ‘경영권 전쟁’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동제약의 지분 29.36%를 보유한 녹십자는 1월 24일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을 막았다. 지주사 전환 시 일동제약 최대 주주인 윤원영 회장의 지배권이 더욱 단단해질 수 있었다.증권가에서는 이 같은 양사의 경영권 분쟁은 해외 제약 업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제약 업계 역시 격렬한 인수·합병(M&A)의 장으로 변하고 있는 증거가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일동제약은 1월 24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 투자사업부문(일동홀딩스)과 의약품사업부문(일동제약)을 분리하는 내용의 지주사 전환 안건을 상정했다. 하지만 2대 주주인 녹십자 등의 반대로 부결됐다. 녹십자 대리인은 임시 주총에 참석해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해 일동제약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녹십자는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영향력 행사’로 변경했다. 사실상 경영 참여 의사를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녹십자, 사실상 경영 참여 의사 밝혀
두 회사 간의 지분 경쟁은 이미 2012년 12월부터 시작됐다. 당시 녹십자는 환인제약으로부터 177만 주를 사들여 일동제약 지분율을 기존 8.28%에서 15.35%로 크게 늘렸다. 위기감을 느낀 일동제약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윤 회장 일가는 2013년 2월 당시 일동제약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주요 주주 안희태 씨로부터 175만 주를 사들이며 지분율을 기존 30.28%에서 37.04%로 크게 늘렸다.
양사 간의 지분 경쟁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인 2014년 1월 녹십자가 또 한 번 대규모로 일동제약의 지분을 매입하며 다시 불이 붙었다. 녹십자가 1월 10일 당시 지분 12.57%를 보유한 주요 주주였던 이호찬 씨의 지분 전량을 매입한 것이다. 동시에 특수관계인인 녹십자홀딩스와 녹십자셀도 각각 0.88%, 0.99%의 지분을 취득해 녹십자의 총 지분율은 15.35%에서 29.36%로 단박에 늘었다. 그러자 일동제약 측이 지주사 전환을 주요 안건으로 상정하며 임시 주총을 연 것이다. 결국 일동제약의 계획은 예상과 다르게 끝났다. 지분 9.99%를 가지고 있는 3대 주주이자 캐스팅보트인 피델리티가 녹십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양사의 힘겨루기를 바탕으로 녹십자가 3월 15일 열리는 주총에 이사 선임을 요청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 달리 2월 3일 일동제약 측은 “녹십자로부터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아무런 의사 표시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녹십자는 일동제약 이사 선임권을 행사하려면 6주 전인 1월 마지막 주까지 문서로 일동제약 측에 의사 표시를 했어야 했다. 녹십자 역시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일동제약과 녹십자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M&A 전문가들은 “아직 ‘묘한 흐름’이 남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영권을 얻기 위해 한 주가 아쉬운 시기에 일동제약의 관계사인 일동후디스(일동제약 지분율 29.9%)와 루텍(일동제약 지분율 46.3%)이 일동제약 지분 1.76%를 장내 매각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윤 회장 및 특별 관계 주주들의 지분율은 기존 37.04%에서 35.29%로 낮아졌고 녹십자와의 격차는 더욱 줄었다.
인수 성공하면 제약 업계 1위로 올라서
일동후디스와 루텍이 지분 매각의 이유로 밝힌 것은 ‘자금 확보’다. 일동후디스 관계자는 “최근 실적이 부진해 현금 확보 차원에서 일동제약과의 협의 후 보유 중인 주식을 매각했다”면서 “일동제약과의 상호 출자로 의결권이 제한돼 주식 매각으로 일동제약 경영권 방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일동후디스의 주식 매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일동후디스가 보유한 일동제약 주식을 장내에 매각하는 순간 의결권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만약 해당 주식을 녹십자나 녹십자의 우호 세력이 매입하면 일동제약 경영진은 최대 주주 지위를 더욱 위협받게 된다.
이와 관련, 업계에서는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의 행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 회장은 일동제약 평사원으로 입사해 50년 동안 근무하면서 최고경영자(CEO)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2010년 당시 일동제약 2대 주주였던 안희태 씨와의 마찰 등 분쟁에 휘말려 일동제약 회장에서 퇴진했고 이후 일동후디스 회장으로 물러났다. 현재 이 회장은 일동제약의 2대 주주이자 일동후디스의 개인 최대 주주(이금기 회장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 41%)이기도 하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이 회장 입장에서 보면 만약 녹십자가 분쟁에서 승리한다면 분명 큰 부담이 생긴다”면서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일동제약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이번 기회에 관계를 정리한다면 지분 매각을 통해 자금 확보는 물론이고 자신의 지분을 바탕으로 양자(일동제약과 녹십자) 사이에서 ‘진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제약 업계에서는 이 같은 녹십자와 일동제약의 지분 경쟁이 ‘남의 일’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간 제약 업계는 창업주들 간의 인연을 바탕으로 서로 상대방의 영역은 잘 건드리지 않는 ‘보수적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제약사들은 빠르게 M&A에 눈을 돌리고 있다. 내수 시장의 한계 때문이다. 한국 의약품 시장은 연간 13조~15조 원 규모에 불과하지만 완제품 의약품 250여 곳과 원료 의약품 400여 곳 등으로 많은 데다 서로 비슷한 항목을 보유해 경쟁이 치열하다. 더구나 정부가 지속적으로 약가 일괄 인하와 리베이트 쌍벌제, 시장형 실거래가제 등을 내놓으며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결국 M&A로 규모를 키우고 파이프라인을 보강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이 2000년 전후 약가 인하로 수많은 제약사가 M&A 등을 통해 구조조정된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실제로 녹십자가 일동제약을 인수한다면 매출 1조 원 규모의 유한양행을 제치고 독보적 업계 1위로 올라선다. 특히 녹십자는 전문의약품에 비해 취약했던 일반 의약품 라인을 단숨에 강화할 수 있게 된다.
제약 업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중소형 제약사에 대한 M&A가 본격화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정부가 2017년 10대 제약 강국 도약을 위해 자발적 구조조정을 원하고 있는 만큼 제약사 간의 M&A가 더 격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