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인터뷰] “민영화보다 시장구조 개혁이 더 중요”

한국 대표 싱크탱크를 가다 - 이일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글로벌 싱크탱크 평가서 한국 1위…한중 FTA·TPP 전략 등 연구 박차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국책 연구소 중 출발이 늦은 편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출범 이후 시장 개방 압력이 커지고 구소련 붕괴로 북방 정책이 새로운 현안으로 막 등장하던 ‘격동’의 1989년 문을 열었다. 그 후 글로벌 경제와 관련된 정책 현안이 급증하면서 연구원의 역할과 중요성이 몰라보게 커졌다. 1월 2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이 발표한 글로벌 싱크탱크 랭킹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세계 6826개 연구 기관 중 54위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 싱크탱크 중 가장 높은 순위다. 이일형(56)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은 “대외경제를 다루기 때문에 외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며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세계경제의 흐름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는 선제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영국 워릭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줄곧 국제기구에 몸담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지난해 5월 주요 20개국(G20) 국제협력대사(셰르파)로 임명되면서 24년간의 국제통화기금(IMF)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셰르파는 각국 정상을 대리해 G20 정상회의 의제 등을 조율하는 자리다. 이 원장은 작년 8월 제9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에 선임됐다.


그사이 업무 파악이 좀 되셨습니까.
이제 겨우 파악한 것 같아요. 지난해 G20 셰르파가 됐을 때는 연구원을 이용하는 소비자 입장이었지요. 학계와 연구소 중에서 자문 받을 수 있는 데를 찾았는데 결국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몇몇 소수 대학뿐이었죠. 원장이 되고는 연구원 내부자로서 새로운 걸 많이 경험했고요.


연구원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연구 영역은 IMF와 세계은행을 합친 것과 같은데 인력은 비교할 수 없게 적어요. IMF는 연구원이 2000명, 세계은행은 1만 명쯤 됩니다. 우리는 행정직 다 합쳐도 200여 명에 불과하죠. 벅찬 일을 소수의 인원이 해내고 있는 겁니다. 대외 경제 문제에 대해 정부를 지원하는 총체적인 책임을 사실상 연구원이 다 지고 있어요. 200여 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죠.


10월 세종시 이전이 예정돼 있습니다. 인력 유출 문제는 없습니까.
최근 몇 년간 상당히 많은 박사급 인력이 연구원을 떠났습니다. 주로 대학행을 선택했어요. 연금이나 복지 혜택이 유리하기 때문이죠. 세종시로 내려가면 교육이나 여러 가지 생활 여건이 나빠질 것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어요. 특히 연구원의 핵심인 40대 박사들이 많이 빠져나갔죠.


생각하는 해법이 있습니까.
박사 학위를 막 끝낸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얼마 전 미국 현지에 가서 40여 명을 인터뷰했죠. 우리는 다른 곳에서 못 주는 좋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요. 국제기구나 해외 연구 기관, 학계와 연계망이 한국에서 가장 잘 갖춰져 있고요. 이를 통해 국제무대에 계속 머무르면서 활동할 수 있죠. 또 하나는 중간 허리 인력의 공백을 원내 연구원이 아니라 외부 대학 연구자와 공동 연구로 채우는 방법이에요.


그래도 연봉 등에서 경쟁이 어려울 텐데요.
국책 연구원은 민간보다 인건비가 훨씬 낮게 책정돼 월급으로는 경쟁할 수 없어요. 남는 것은 사명감이에요. 연구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이를 경제정책에 반영해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은 이미 다 나갔다고 봐요. 과거 IMF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2000년대 들어 세계경제가 안정되면서 IMF의 역할이 도마 위에 올랐어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거죠. 연봉도 많이 깎였고요. 그때 중간 허리 인력이 많이 나갔어요. 남은 사람은 두 부류였죠. 우수한 인력이지만 국제사회에서 공적 역할을 맡아 기여하고 싶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과 실력이 없어 못 떠난 사람들이에요.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투자은행으로 옮기면 훨씬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지만 사명감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남아요. 우리 연구원에도 그런 사람이 많아요. 그들을 믿고 키워주고 싶어요.


올해 역점 사업은 무엇입니까.
통상 분야에서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빠르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경제 효과나 협상 전략 등을 자문하기 위해 분석과 연구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건 통상 문제로만 끝나지 않아요. 한국 경제의 구조 개혁과 직결되는 문제예요. 또 미국의 금융정책이 정상화로 가면서 신흥국들도 정상화 과정을 겪게 될 겁니다. 이것도 잘 지켜 봐야죠.


“실업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데 기업 이윤은 오히려 높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죠.”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입니까.
원장으로서, 또 G20 셰르파로서 고민하는 게 저성장과 고실업률 문제입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G20의 가장 큰 어젠다이기도 하죠. 작년 박근혜 대통령이 질서 있는 시장경제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매우 독특한 경제 현상이 자리하고 있어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확장적 재정·금융정책으로 경기가 부양되는 듯하다가 다시 주저앉길 반복하고 있어요. 이런 가운데 실업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기업 이윤은 높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경제성장에 문제가 생기면 기업 이윤이 떨어져야 맞거든요.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요. 유럽, 특히 독일이 이 문제를 가장 큰 화두로 삼고 경제구조 개혁 작업을 추진하고 있죠.


실업률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같은 맥락이에요. 세계적으로 특히 청년 실업이 심각한데 시장경제가 활발하게 작동한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오느냐는 거죠. 세계화나 금융화, 기술 등 여러 분석이 있는데 구조적인 요인은 자연적으로 고쳐지는 게 아니라 정부가 나서 정책으로 고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어요. 논란이 된 민영화도 그래요. IMF도 구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를 많이 주장했지만 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영화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민영화 주장이 쏙 들어갔어요. 민영화냐 민영화가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질서 있는 시장경제가 더 중요한 겁니다.


앞으로의 발전 방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은 지금까지 중진국으로서 계속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습니다. 세계경제는 우리가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외생변수로만 보였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과제였어요. 이제는 G20의 일원으로 어젠다 설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 어젠다를 어떻게 이끌고 영향을 미칠 것인지 연구가 필요해졌어요.


대담 김상헌 편집장·정리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