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스마트폰 밀어내고 혁신 아이콘 된 TV

곡면·초고화질 앞세워 ‘진격’…‘오버스펙에 불과’ 평가도

전 세계 내로라하는 정보기술(IT)·가전 업체가 몰려드는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박람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해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이 행사의 본격적인 개막은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기조연설로 시작된다. CES가 열리기 하루 전 이뤄지는 개막 전 기조연설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연설이 이뤄지는 연단은 유명 기업 CEO들이 마지못해 돌려 막는 인사치레의 장이 아니다. 한 해 동안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자산업의 화두를 이끌어 갈 기업의 CEO만 연단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 때문이다.

한때 CES의 기조연설이라면 으레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의장이나 스티브 발머 CEO 같은 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1년 전인 2013년에는 어땠을까.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소니 같은 전통의 강자들을 제치고 연단에 선 이는 폴 제이콥스 퀄컴 CEO였다. 그는 단상에 오르자마자 “모바일 기업이 개막 전 사전 기조연설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객석에선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퀄컴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모바일용 중앙처리장치(CPU) 칩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퀄컴 CEO의 CES 개막 기조연설은 IT·가전 업계의 화두가 ‘모바일(mobile)’로 넘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지난 1월 7일 열린 CES 2014. 같은 자리에서 불과 1년 만에 다시 열린 행사는 IT·가전 산업의 라이프사이클이 얼마나 짧은지 여실히 보여줬다. ‘모바일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2013년에 비해 2014년 CES의 관심은 온통 TV에 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애널리스트는 “혁신의 주도권이 모바일에서 TV로 옮겨갔다”는 상찬을 쏟아냈을 정도다.


<YONHAP PHOTO-0807> 삼성전자, CES2014 참가 (서울=연합뉴스) 모델들이 오는 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하는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CES 2014에서 삼성전자가 전시하는 105인치 커브드(곡면) UHD(초고해상도) TV와 다양한 라인업의 커브드 UHD TV를 선보이고 있다. 2014.1.6 << 삼성전자 제공 >> photo@yna.co.kr/2014-01-06 14:27:26/ <저작권자 ⓒ 1980-201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삼성·LG, 혁신 제품 쏟아내
매년 그랬듯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올해 CES에서도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든 기업이었다. 행사장 입구에 자리한 LG전자 부스에는 3D TV를 연결해 만든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화제에 올랐고 삼성전자 부스 역시 감상은커녕 이동이 어려울 만큼 인산인해를 이뤘다. 두 회사 전시관의 핵심 제품은 바로 TV였다.

사실 TV가 혁신의 아이콘 자리를 물려준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흑백 TV에서 컬러 TV, 브라운관에서 액정표시장치(LCD) 평면 패널로의 변화 같은 ‘도미넌트(dominant) 디자인’을 기대하기엔 더 이상 혁신의 소재 자체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중론이었다. 제조사가 요란하게 광고했던 ‘스마트’나 ‘3D’는 ‘패널을 통해 본다’는 TV의 본질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새로움을 안겨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현재의 평가다.

‘TV의 혁신은 끝났다’는 평이 무색할 정도로 올해 CES에서 TV가 또다시 주인공으로 떠오른 건 바로 이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핵심 키워드는 ‘곡면(curved)’과 ‘4K’다. 곡면 TV는 말 그대로 U자형으로 휘어진 LCD 패널을 사용한 제품이다. 커브형 스마트폰 패널의 등장에 이어 105인치에 이르는 거대한 곡면 LCD 패널의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4K는 UHD(Ultra High Definition)라고도 불리는 초고화질 패널을 가리킨다. 땀구멍까지 생생하게 드러내 TV 속 스타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기 바빴던 기존 HD TV의 해상도에 비해서도 4배 이상 높은 화질을 자랑한다.

올해 CES에선 글로벌 톱 TV 메이커인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곡면과 UHD에 집중했다. LG전자는 UHD 화질의 곡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선보였고 삼성전자는 55, 65, 78, 105인치 등 총 4가지 사이즈의 UHD TV를 내놓았다. 특히 삼성전자가 내놓은 ‘가변형(bemdable)’ 85인치 UHD TV가 큰 관심을 받았는데, 사용자가 휘어짐의 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다. 곡면형 TV가 싫다면 리모컨 버튼 하나로 평면 패널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글로벌 리더답게 박람회 주최인 전미가전협회(CEA)를 비롯해 다수의 현지 매체가 선정하는 최고 혁신상을 휩쓸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한국 브랜드뿐만 아니라 소니·도시바·샤프·하이얼·하이센스·스카이워스·TCL 같은 기업들도 모두 곡면과 UHD, 대형 LCD 패널에 집중했다. 특히 중국 업체들의 약진이 눈에 띄었는데, 하이얼·하이센스·TCL·스카이워스 등이 모두 한국과 일본 기업의 기술력을 상당 부분 따라잡았음을 알렸다. 다만 화질과 베젤(테두리)의 정교함 같은 측면에선 아직까지 기술 격차를 보였다는 게 한국 기업엔 그나마 안심이었다.

기술 혁신이 항상 더 많은 돈벌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제조사로선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시장에서 팔려야 의미가 있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재등장한 TV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 역시 바로 이 상품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TV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노트북 속 동영상도 케이블을 연결하거나 그마저도 귀찮다면 무선으로 연결해 볼 수 있는 스마트 기능이 널렸지만 여전히 리모컨 채널 버튼만 아래위로 하염없이 오르내리는 이들이 대다수인 게 현실이다. 더욱이 생생한 화질을 육안으로 느끼기에는 HD급 화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도 많다.

UHD를 받쳐줄 콘텐츠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현재 HD 방송도 전송률 문제 때문에 화면이 빠르게 움직일 때 영상이 깨질 때가 많은데, UHD 같은 경우 현재보다 더 큰 대역의 주파수를 사용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UHD용 전파를 통한 방송 송신은 계획조차 잡혀 있지 않은 상태다. 몇 년 전 모든 콘텐츠가 3D로 제작될 것이라고 믿었던 무모함이 데자뷔가 돼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환호성을 올리지만 곡면과 UHD가 취업에 목매는 대학생의 경우처럼 몇몇 마니아만 열광하게 하는 오버스펙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국발 가격 하락은 불가피
성패를 가름할 핵심은 역시 ‘가격’이다. 적어야 500만 원(그것도 50인치대)에서 많게는 2000만 원이 훌쩍 넘는 TV는 일부 부유층의 장난감일 수밖에 없다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과거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이나 3D, 스마트 TV가 그랬던 것처럼 UHD TV의 가격 하락세도 매우 가파르다. 미국에선 불과 몇 달 전 4500달러 이상이었던 UHD TV가 최근엔 3000달러에 판매되고 있다.

UHD TV의 가격 하락세를 더욱 부채질하는 건 중국이다. 시장조사 기관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UHD TV 판매량은 200만 대에 그쳤다. 하지만 올해는 1300만 대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체 LCD TV 판매량 중 UHD TV의 비중도 2013년 1.6%에 그쳤던 것이 올해 9.4%, 2017년에는 38.5%로 대폭 상승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은 지난해 전 세계에서 판매된 UHD TV의 86.7%를 소화했다. 올해는 78%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중국의 UHD TV는 중저가형 모델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 디스플레이리서치는 올해 중국 시장의 UHD TV 평균 판매가가 973달러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업계에선 “저가형 모델을 내세운 중국산 제품이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면서 프리미엄급 모델도 고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소비자의 인식이 퍼져나갈 것”이란 우려도 있다. 하지만 ‘중국발 UHD TV 가격 하락세’라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디스플레이서치는 중국을 제외한 세계시장의 UHD TV 평균 판매 가격이 작년의 4313달러에서 올해는 1637달러로 대폭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격 외 시장 요건도 장밋빛 전망에 힘을 더한다. 우선 완만한 경기 회복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4.2%까지 떨어졌던 글로벌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올해 경기 회복에 힘입어 5.2%로 상승 반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TV는 비교적 비싼 가격 때문에 경기 회복과 수요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표적인 내구재다. 중국(2015년)·러시아(2015년)·인도(2014년)·터키(2015년)·브라질(2016년) 등 주요 이머징 국가의 아날로그 방송이 곧 종료된다는 점도 시장 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다. 오는 6월과 8월 브라질에서 열리는 월드컵과 올림픽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중남미 시장을 공략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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