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가업 잇는 청년 장인들] 햇볕·바람에 내거는 전통 방식 고수

70년 명맥 잇는 김민균 쌍송국수 사장

충남 예산군 예산리 시장 길목에 일본식 목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52년에 지어진 ‘쌍송국수’다. 당시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 입구와 2층에는 국수 가락이 가지런히 내걸려 있다. 늘어선 국수 장막을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뿌옇게 날리는 밀가루 가루를 뚫고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쌍송국수 3대 가업을 잇는 김민균(32) 사장이다. 바삐 돌아가는 기계에서 뽑아내는 하얀 국수 가락은 투박한 김 사장의 손을 타고 나오기가 무섭게 대나무 막대에 걷힌다. 김 사장의 어머니 임명금(52) 씨는 그걸 가게 밖에 내다 거느라 분주하다.



명불허전이 아닌 ‘면(麵)불허전’이다. 쌍송국수는 이 일대 제일의 제면소로 꼽힌다. 햇볕에 건조해 ‘태양국수’라고도 부르는 건면을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70여 년에 걸쳐 3대를 잇는 이곳의 국수에는 추억과 정성어린 맛이 온전히 담겨 있다.

김 사장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쌍송국수를 운영한 지는 3년, 2011년 아버지 김성산 씨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부터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번듯한 회사에 입사해 한창때를 누리던 그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아버지가 간경화를 앓고 있었는데 그해 6월쯤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병상에 누워서도 국수 걱정을 하시는 통에 어머니는 가게에 나가시고 결국 제가 아버지 병간호를 하게 됐는데 이미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내려왔었어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리고 몇 개월 후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유언으로 가업을 이으라고 하셨어요.”

사실 김 사장은 제면소를 이어 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옆에서 봐 왔으니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아는 터였다. 아들이 대물림하길 바란다는 아버지의 권유도 매몰차게 뿌리치기 일쑤였다.

“나 하나만 힘들면 되는데, 이 일은 온 가족이 힘들어요.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15시간을 넘게 꼬박 움직여야 돼요. 그것도 가족이 다 손을 보태야 가능한 일이고요.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나 제 아내에게 그런 고생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오죽하면 학교 다닐 때 꿈이 무작정 ‘회사원’이었겠어요.”

김 사장은 온 가족을 고생하게 하는 아버지를 지독하게 원망도 했다.

“아버지는 새벽 4시부터 일을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저녁에 일찍 잠드시니까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정말 아버지 얼굴을 못 보고 살았어요. 어머니도 아버지 곁에서 일을 거드셔야 하니까 학교 행사에 못 오시는 게 당연했고요. 정말 원망 많이 했어요. 또 국수란 게 그렇잖아요. 가난이 먼저 떠오르는. 가난한 집이나 하는 게 제면소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게 국수라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다닐 때까지 국수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쌍송국수는 6·25전쟁 전후로 김 사장의 할아버지가 하던 방앗간에 이어 본격적으로 국수 제면소를 하게 됐다. 예전에는 ‘삯국수’라고 제면기가 없는 집에서 기계 삯을 주고 국수 가락을 뽑아 그걸 집에서 말려 파는 이들이 있었다. 쌍송국수의 시작도 그랬다. 그렇게 70년이 지났다. 그 세월·전통·추억을 등지고 문을 닫을 수도 없었거니와 요즘 가내수공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데가 흔하지 않다 보니 이 전통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동했다.

먼저 아버지가 병상에 있는 동안 밀려 있던 주문부터 처리하는 게 일이었다. 국수 뽑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만만치 않았다. 어릴 때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일을 도왔지만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은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일이 서툰 데다 함께 일하는 어머니와 하루에도 몇 번씩 투닥거리기를 반복했다. 큰일 보겠다고 화장실만 가도 혼이 났다. 커피도 식혀 놓았다가 한번에 들이켜는 습관도 그래서 생겼다. 화끈한 모자여서인지 화 푸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 임씨는 “둘 다 성격이 화끈해 소리 꽥꽥 지르면서 싸우다가도 금방 또 푼다”고 맞장구를 친다.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또래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럴 때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밥 먹듯 했다.


입소문 쑥쑥…전국서 택배 주문 밀려
그도 그럴 것이 쌍송국수에 있는 기계로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는 국수의 양은 고작 밀가루 1포대다. 기계는 하루에 20번을 넘게 돌고 사람은 그보다 곱절은 움직인다. 하루 15시간이 걸려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가족들 모두 손을 보태야만 제 일을 끝낼 수 있다. 뽑아낸 국수를 말리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꼬박 이틀이다. 그늘에 하루 숙성한 후 말려야만 국수가 쫄깃해지기 때문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설명하는 김 사장에게서 제법 노련함이 묻어난다.

“아휴, 3년 됐어도 잘 모르고 힘든 건 똑같아요(웃음). 아버지가 돼 가는 것인지 아직 많이 부족해요. 그런데 손님들이 계속 수제 국수만 드시다 보니까 여기 분들은 국수가 모두 이 맛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할아버지 친구분 그리고 그 아들들, 그 아들의 아들들까지 3대가 단골손님인 집도 많고요. 한 번 드셨던 분들은 이제 기계로 만든 국수는 못 먹겠다고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힘들다고 그만둘 수 있겠어요. 뿌듯하기도 하고요.”

모든 음식은 기억으로 먹는다고 했던가. 익숙한 손맛과 추억이 어린 음식은 쉽게 끊을 수 없다. 국수도 그중 하나다. 국수 면발에 즐거울 때와 배고프던 시절의 기업이 겹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쌍송국수는 이들을 위해 예나 지금이나 바삐 돌아간다. 그 일상이 70년을 이어 갔다.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받거나 다른 상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이 집이 지금까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또한 기업의 장수 비결과 마찬가지다. 물론 때로는 새 사업을 개척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원칙은 그대로다.

“주말이라고 쉬거나 여행을 하는 건 여전히 꿈도 못 줘요. 와이프가 잘 참아주고 있지만 가끔 죽겠다는 소리도 해요(웃음). 혹시 날이 궂으면 잠시 쉬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머니와 번갈아 가며 일하죠.”

쌍송국수에 변한 게 있다면 ‘국수 뽑아내는 속도’와 ‘배달 범위’다.

“아버지가 이거(김 사장이 직접 개조한 국수 기계) 보시면 기절하실 텐데…(웃음). 아버지 때보다 작업 속도가 두 배나 빨라졌어요. 그렇다고 더 많이 만들지는 않아요. 주문 양은 비슷하니까요. 맛이 달라질 수도 있고요. 어떻게 아셨는지 전국에서 주문이 들어오는데, 지금은 택배 시스템이 워낙 잘돼 있다 보니까 못 가는 데가 없어요. 당일 배송 아니면 하지도 않아요. 서울 백화점에서도 입점하라고 연락을 받았지만 거절한 이유가 거기에선 같은 맛을 낼 수 없어서예요.”

그는 며칠 전 득남했다. 아들, 또 대를 이을까. 대대로 가업을 잇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다.

“아버지가 제게 그러했듯 자연스럽게 일을 접하게는 할 테지만 강요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같은 기쁨을 느끼면 좋겠어요. 제가 아버지 뒤를 잇고 가장 기쁜 건 어렸을 땐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뿌연 밀가루 날림 속에 젊은 청춘 김 사장은 한 가지 깨달음을 던진다. ‘서두르지 말고 지나친 욕심을 갖지 말며 비운 듯 채워라.’ 그것이 행복이고 삶의 지혜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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