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가업 잇는 청년 장인들] 전통 속에서 새로운 가치 찾는 신세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꿈에 도전…세제 등 지원 제도 ‘과제’

주변을 돌아보면 한창때인 청년들이 가업을 잇는 경우가 왕왕 있다. 서울에서 번듯한 회사에 다니다가도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내려가 가업을 잇는 이들의 이야기는 놀랍지만 사실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소나 돼지 등 가축을 키우거나 식당을 물려받고 하루 종일 국수를 뽑아내거나 농사를 지으며 아버지의 뒤를 잇는 이들도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인기 직업’은 아니다. 보통의 청년들이 생각하지 않는 힘든 일들이 대부분이다.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제 양복의 명성을 잇기 위해 아버지의 일터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애니매이션 디렉터, 시계 수리공, 빵집을 가업으로 잇는 청년도 있다.

이들은 하는 일이 무엇이든 평생 곁에서 지켜봐 온 부모의 업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발견하고 꿈을 실현해 나가며 가업을 잇고 있다. 단순한 부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닌 진정한 가업 말이다.


전통떡·수제양복·대장장이 등 줄이어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대개 오래된 장수 기업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에서 100년 이상 된 기업은 한 손에 꼽히는 정도다. 그것도 연매출이 수천억 원 대인 덩치가 큰 기업이 전부다. 그래서 정작 대를 잇는 가업에 대해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는 이중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일본이나 유럽 등의 나라에는 수백 년 동안 가업을 이어 온 작은 가게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업을 잇고 있는 이들의 소식은 반갑다.

최근 가업 승계 우수 성공 사례집을 내놓은 중소기업중앙회의 이창호 가업승계지원센터장은 “성공한 가업 승계 기업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든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유연함”이 그것이다.

서울 도곡동의 ‘김영모 과자점’은 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토종 브랜드인데, 제품과 패키지, 인테리어나 마케팅 면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경영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큰아들과 패키지를 비롯한 가게 전반의 디스플레이를 담당하는 아내와 막내딸, 유럽에서 유학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과인의 길을 걷고 있는 둘째 아들이 있다는 점이 크게 일조한다.

3대를 잇고 있는 김민균(32) 쌍송국수 사장은 지금도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종일 앉을 틈도 없이 일한다. 국수를 뽑고 자연 건조하는 일은 이곳만의 전통이다. 살아생전에 늘 이 방식을 고수해 오던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다. 김 사장은 “아버지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배운 게 지금 경영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1945년에 문을 열어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알려진 전북 군산 이성당도 바로 앞에 있던 군산시청이 1990년대 중반 이전하면서 상권이 이동하자 갑작스러운 매출 하락과 적자에 직면했다. 4대를 잇는 김현주 대표는 앙금빵(단팥빵)·야채빵 등 전통 빵을 지키는 한편 토스트 등 새 아이템을 추가해 기존에 없던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이들처럼 성공한 가업 승계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규모가 작을수록 일거리가 줄어들어 소비자들의 관심 밖 대상이 돼 사라지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어느 정도 성장한 기업은 가업 승계 세금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연매출이 수십~수천억 원을 넘나드는 중소기업은 더욱 그렇다. 이 센터장은 “지나친 규제로 많은 이들이 가업 승계를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최고경영자(CEO) 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절세전략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성공을 좌우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CEO의 경영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중소기업의 CEO는 은퇴 상황에 놓여 있다. 은퇴를 앞둔 CEO가 해야 하는 역할은 분명하다”고 지적하며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를 임명해 계속적으로 회사가 유지되고 발전하도록 할 적임자를 CEO의 가문에서 찾는 게 일반적이고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CEO의 은퇴 문제는 자연스럽게 ‘가업 승계’의 문제로 발전된다.


중소기업은 2세 경영 탄력
그런데 후계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폐업하는 예가 많아 기술의 맥이 끊기는 것이 예사다. 그나마 올 초 1월 1일 국회에서 가업 승계 공제 혜택 대상 기업 기준을 연매출 2000억 원 이하에서 3000억 원 미만으로 확대하고 상속세 공제율도 70%에서 100%로 늘려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피상속인 생존 시 안정적으로 후계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사전 증여 가업 승계 증여세 공제 한도는 여전히 30억 원에 한해 증여세를 10%만 물리는 과세특례를 적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볼멘소리는 여전하다. ‘증여 세제’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업주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특성상 가업 승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사망 전에 재산을 미리 물려주는 증여에 대한 세제 혜택도 늘어나야 한다는 논리다.

물론 중소기업인의 큰 애로 사항이었던 가업 승계 상속세가 올해부터 100% 면제되면서 중소기업의 가업 승계가 한층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의 ‘2세 경영’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소기업의 상속세 부담 완화는 부의 대물림이 아니라 기술의 전승이라는 찬란한 유산을 대물림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정부의 지속적인 감면 혜택 확대가 조세 형평성을 해치는 과도한 정책이란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립대 세무학과의 한 교수는 “가업 상속 공제는 중소기업 종사자들의 고용 안정을 전제로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것인데, 이처럼 지속적으로 확대된다면 ‘부의 세습’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상속세의 20%를 내면 10년간 유예해 주는 방식으로 가업 승계를 유도하고 있고 미국과 호주는 2010년께 상속세를 전격 폐지할 방침이다.

‘100년 기업을 위한 승계전략’의 저자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 대표는 이 책에서 주로 가족 기업이 가족과 기업 모두를 성공으로 이끌며 100년 이상 장수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많은 한국 기업들이 세금 문제에 매달리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공적인 승계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핵심은 돈이 아니라 기업가 정신과 책임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것이라는 얘기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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