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가업 잇는 청년 장인들] 해외 합작으로 창작 애니메이션 꿈 도전
입력 2014-01-21 09:47:35
수정 2014-01-21 09:47:35
‘사이킥 히어로’ 탄생시킨 김태현 K프로덕션 CD
영화 제작을 꿈꾸던 청년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대부가 됐고 그 아들은 애니메이션 ‘한류’를 이끌겠다는 목표를 안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한다. K프로덕션(K-production)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김성웅(66),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인 김태현(37) 부자의 얘기다.김성웅 K프로덕션 대표가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70년대 한국 굴지의 영화 제작사인 세경영화사에서 일하던 김 대표는 갑작스레 부서 내의 애니메이션 파트를 전담하게 됐다. 당시 일본의 도에이애니메이션·다쓰노코프로덕션 등 유명 업체들이 손재주가 좋은 한국에 원화·채색 등 일정 부분을 맡기는 이른바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EM)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영화 제작자의 꿈을 가진 제게 갑작스레 다른 업무를 맡기는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하다 보니 극영화나 애니메이션이나 다를 바가 없더라고요. 아,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 몰입했지요.”
아들 합세…OEM서 창작으로
그때부터 김 대표의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애니메이션 관련 자료가 없어 한국에 파견 나와 있는 일본인 전문가들을 쫓아다니며 관련 기술을 배웠고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1976년엔 아예 독립해 일본·미국 등 해외 애니메이션 OEM을 전담하는 회사도 세웠다. K프로덕션은 그렇게 닻을 올렸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였던 1980~1990년대에 김 대표의 회사도 업계에서 명성을 쌓아 갔다. ‘마징가 Z’, ‘그랜다이저’, ‘꽃의 요정 루루’, ‘철인 아톰(컬러판)’ 등 셀 수 없는 명작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김태현 CD는 아버지의 비즈니스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연극 연출을 전공한 김 CD는 무역에 관심이 많아 정보기술(IT)·자동차 업체 등에서 해외 영업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으로 KBS N에 입사해 캐릭터 라이선싱 업무를 맡게 됐고 애니메이션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 회사에 몸담기로 결정했다. 언제나 애니메이션에 둘러싸여 살았던 시간들이 알게 모르게 김 CD의 자양분이 돼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 그게 2007년 무렵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김 대표는 큰아들에게, 차남인 김 CD에게도 한 번도 가업을 이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OEM을 하다 보면 마감 기한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밤샘 작업이 많아 너무 고되고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아티스트적 성향이 강한 직원들을 관리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김 대표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스토리 보드까지 써내려 가는 김 CD를 보면서 살포시 가능성을 엿보았고 마침내 그에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함을 내주게 됐다.
이처럼 김 CD의 합류로 K프로덕션은 체질을 개선하게 됐다. 그동안 주문이 들어오면 제작하는 전문 OEM 업체였다면 그때부터 직접 창작까지 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 부품만 만들던 협력 업체가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변화였다.
“아들의 아이디어로 완성된 ‘사이킥 히어로’는 K프로덕션이 낳은 첫 자식이에요. 남의 작품이 아닌 내 것을 만들고 싶었던 제 오랜 소원을 아들이 대신 이뤄준 겁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김 CD 또한 아버지가 30년 이상 쌓아 놓은 노하우와 기술력 덕분에 마음껏 ‘창작’에 도전해 볼 수 있었다.
그가 탄생시킨 첫 작품인 ‘사이킥 히어로’는 SF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나라 간의 분쟁을 ‘다트’라는 스포츠로 해결한다는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였다. 특히 이 작품은 K프로덕션이 연출·기획·시나리오·캐릭터 개발 등 프레 프로덕션의 전 과정을 총괄하고 레이아웃·원화·컬러 등을 태국의 스튜디오가 담당하는 합작 형태로 진행됐다. 한국 측 감독 4명이 태국 회사에서 전체 제작을 진두지휘했다. 그동안 K프로덕션이 해오던 것과 정반대 방식인 셈으로, 해외 합작 파트너를 일본·유럽 중심에서 태국·말레이시아와 같은 동남아 국가까지 확장하고 한국 업체가 기획을 주도한다는 점 때문에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태국 애니메이션 콘텐츠 제작사 브로드캐스트 타이 텔레비전(BTT)으로부터 총 제작비의 50%인 15억 원을 투자받았고 현지의 채널3 방송사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일을 성사시키기까지 태국 상무관의 도움이 컸지만 가업을 이어가기 전 해외 영업 등에 종사했던 김 CD의 역할이 지대했다.
해외 파트너 유치하며 ‘한류’ 주도해
김 CD는 곧이어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저작권이 있는 캐릭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로열티를 받는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K프로덕션은 2010년에는 디자인 설이 만든 귀여운 여자아이 캐릭터인 뚱(ddung)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로부터 투자 유치를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이 주관한 2010 국제방송영상견본시(BCWW 2010)를 통해 현지 애니메이션, 광고 제작 업체인 크리에이티브미디어 랩과 합작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3사 합작으로 탄생한 애니메이션 ‘내 사랑 뚱’은 귀여운 네 살배기 주인공 뚱과 가족들의 일상에서 오는 소소한 이야기를 코믹한 터치로 그린 작품으로, 2012년 MBC에서 방영돼 많은 어린이 시청자 층을 확보했다. 지난해엔 중국·동남아시아·유럽 등 세계 60개국과 콘텐츠 수출 계약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아따맘마’처럼 아기자기한 홈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아들이 또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줬어요. 무엇보다 해외 파트너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투자 유치를 받는 모습을 보며 K프로덕션의 밝은 미래를 보게 됩니다”라는 김 대표의 말에 “솔직히 아버지가 구축한 탄탄한 인맥과 금전적 지원이 없었다면 도전해 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김 CD는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TV 시리즈 26부작을 제작할 때 대략 20억 원의 제작비가 필요하다. 김 CD는 자신이 스타트업 기업에 몸담았다면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쉽게 물려받았다는 세간의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K프로덕션은 새 프로젝트 구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대표의 방에는 새 캐릭터들의 샘플 그림들이 벽 한 면을 채우고 있다. 우선 ‘마법’이라는 요소가 가미된 ‘내 사랑 뚱’ 시즌 2를 준비 중이고 ‘타스와 친구들’이라는 새 창작 애니메이션도 기획 단계에 있다. 일종의 슬랙스팁 코미디로, ‘톰과 제리’ 콘셉트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2D로 제작되는 ‘타스와 프리프리’는 이솝우화를 주제로 하는 에듀 애니메이션으로, 아시아계·유럽계·아프리카계 등 여러 인종을 캐릭터에 반영해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목표로 제작 중이다.
K프로덕션은 전체 제작 물량 가운데 OEM 70%를 유지하고 나머지를 창작으로 채운다. 연매출은 15억 원 정도다. 김 대표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것도 좋지만 안정적인 자금 확보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회사 경영과 관련해선 틈틈이 아들에게 조언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캐릭터, 소소하지만 따뜻한 일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버지와 내 꿈”이라는 김 CD는 “올해부터 많은 수익을 거둬 회사에 기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은퇴하지 않고 영원한 현역으로 남았으면 하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그의 이야기에 부자는 시원하게 웃었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