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새해에 논어 첫 구절을 다시 읽는 이유

공자가 말한 기쁨과 즐거움은 타인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 것

자존심은 국어사전에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고 설명돼 있다. 남에게 굽히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자발적으로 그러는 것은 두 경우뿐이다. 하나는 상대에 대한 존경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 아부하기 위한 것이다. 전자는 행복한 복종이고 후자의 그것은 비겁한 굴종이다. 누구나 자신을 지키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게 없으면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냥 굽히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품위’가 지켜져야 한다. 품위는 사람이 ‘갖춰야 할’ 위엄이나 기품이다. 그건 ‘갖춰지는’ 게 아니라 ‘갖춰야 하는’ 가치다. 공부 잘한다고, 높은 자리 차지한다고, 돈을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고 훈련하며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조금씩 갖출 수 있는 가치다. 그러니까 그것은 ‘수반되는’ 가치가 아니라 ‘수행해야 하는’ 가치인 셈이다.



남 탓하면 주체적 자아는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는 점이다. 자기의 자존심은 타인이 지켜주지 않는다. 타인이 배려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존심이 상할 때 타인을 탓한다. 물론 그의 무례와 불성실이, 혹은 폭력과 야만이 자신의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은 그런 타인의 폭력성과 무례로 인해 망가지는 게 아니다.

‘논어’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건 예사로운 게 아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자신이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낼 마음의 준비가 단단하면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절망하거나 분노할 까닭이 없다. 물론 그건 군자의 몫이지 우리 같은 범인의 몫이 아니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는 있다. 그 정도의 비겁은 애교니까. 하지만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펄펄 뛰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면 결국 자기만 손해다. 그것이 자칫 타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면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똬리를 틀고 자신의 틀 속에 갇히게 된다.

‘세상이 나를 버려? 좋아, 그럼 내가 세상을 버리겠어.’ 잠깐 심리적 배설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런 건 ‘초딩’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도 어른이 돼서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의식 수준은 아주 높은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한다. 겉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을 수는 있다. 다른 사람들과 어색하거나 어렵게 지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편을 마련하는 법이다. 하지만 내재된 분노와 절망은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굳이 어떤 트라우마로 박히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언젠가는 폭발된다. 억지로 가두고 눌러 뒀던 것이어서 임계점에 달하면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건 결국 자기 파멸일 뿐이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동양의 사상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서양 문화와 사상에 대한 한계 인식 때문일 수도 있고 염증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서양에만 경도돼 놓쳤던 동양의 정신과 문화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다만 서양의 사상이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돼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다양성을 누릴 수 있는 반면 동양 사상은 아직도 그런 다양성과 역사성을 보여주지도 맛보지도 못하는 점은 아쉽다.

다양한 ‘논어’에 대한 책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젠 하도 많아 진부할 지경이다. 그런 진부함에 실망한 사람들이라면 리쩌허우의 ‘논어금독(論語今讀)’에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리쩌허우는 ‘논어’의 첫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기쁨(說/悅)’과 ‘즐거움(樂)’은 이 세상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인간의 감성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는다. 기쁨은 자기 자신의 실천에만 관계되지만(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늘 책을 읽고 배우며 생각하면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혹은 책을 읽고 배우면 그것만으로도 ‘능히’ 즐거울 수 있다는 뜻도 될 것이고…), ‘즐거움’은 인간 세상, 혹은 ‘상호 주관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정서다. 배워서 기쁜 것은 세상과 일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데 그칠 수 있다. 친구가 찾아와 즐겁다는 것은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리에 섞여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소(親疎) 관계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소외나 무관심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주머니 속 송곳은 저절로 드러나
그래서 공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번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곧 군자라고 한다. 그것은 비록 무리 속에 살더라도 개인의 존엄과 실재와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건 분명 슬프고 괴롭다. 남에게 나를 알아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공자는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해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는 공자의 충고는 자기의 길을 가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면서 비난이나 칭찬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좌지우지하려는가. 자기의 참모습은 자기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까짓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뭐 별 대술까.

군자(君子)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 혹은 최고의 인격자,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달한 사람이라면 그건 사실 성인(聖人)과 다를 바 없다. 그저 유덕자(有德者)쯤이면 족하겠는데 사실 그마저도 만만한 게 아니다. 어쩌면 하나의 이상에 가까울 뿐 현실적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게다가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런 군자가 어디 있겠으며 설령 있더라도 그런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소인배나 파렴치로 살 수는 없다. 그저 어중간하게 무색무취하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자기 삶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며 어차피 살 것, 이왕이면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만나서 시시덕거려도 뒤끝이 허전하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상대의 허물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굳이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주머니의 송곳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본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뜻이지만 그걸 꼭 재주에만 국한할 까닭은 없다. 자기가 남 탓하지 않고 남의 무관심을 불평하지 않고 험담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마음먹으면 된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평가하고 판단해서 꾸려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게 하는 자존심이라면 마음껏 부려도 된다. 괜히 돼먹지 않은 자존심으로 자기도 힘들고 남들까지 피곤하게 만들 것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것이다. 그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잠깐 쉬울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남 모두를 망가뜨리는 일이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어설프게 남 탓으로 배설했던 허물을 거둬들이고 스스로의 반성과 노력으로 벗어버리면 그래도 덜 부끄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지 남이 자기 삶을 살아주는 게 아니다. 새해는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도록 다시 한 번 마음 다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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