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세계 금융시장 ‘큰손’부상… 대체 투자서 고수익

세계 연·기금의 투자 혁명-저성장과 고령화 파고 넘는다 ⑤ 한국 국민연금

국민연금 적립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2~3년마다 100조 원씩 증가한다. 한국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서 ‘연못 속 고래’가 된 지 오래다. 해외 투자와 대체 투자 확대가 새로운 돌파구다. 다행히 글로벌 금융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 금융시장에서 강력한 ‘신흥 투자가’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410조 원을 주무르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는 매력적인 투자 제안을 든 방문자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고 있다.



강남 신사역 사거리에서 영동호텔 방향으로 100m쯤 가면 오른쪽에 특색 없는 10층 건물이 하나 나온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가로수길이 인접해 매일 수많은 사람이 그 앞을 오간다. 하지만 410조 원(2013년 8월 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주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연·기금의 자산 운용 헤드쿼터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때 극장으로 쓰였던 이 낡은 건물 6개 층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들어서 있다.

기금운용본부가 이곳에 처음 둥지를 튼 것은 2005년 말이다. 기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운용팀을 강화하기 위해 송파에 있는 연금공단 본사에서 아예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 후 연금 자산은 또다시 3배 가까이 불어났다. 기금운용본부는 올해 연금공단과 함께 전북으로의 이전이 결정됐다. 세계 금융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찾는 해외 방문객들은 2016년 하반기부터 서울 강남이 아니라 전주 인근의 혁신도시로 향해야 한다. 낡고 비좁은 건물에서 벗어나 번듯한 사옥을 갖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인력 이탈 우려 등으로 속사정이 복잡하다.

1988년 출범한 국민연금은 세계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젊은 연금’에 속한다. 400조 원을 돌파한 현재 적립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선진국들은 연금 수급자 증가로 기금 규모가 매년 줄어들지만 국민연금은 30조~40조 원씩 꼬박꼬박 쌓인다. 기금 100조 원 단위를 2~3년 만에 돌파하는 놀라운 속도다. 올해 실시한 재정 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2022년 1000조 원을 넘어서고 2043년 2561조 원으로 피크를 기록한다.


적립금 2~3년마다 100조 원씩 증가
문제는 이처럼 무섭게 불어나는 자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이냐다. 지난 10월 공개된 국민연금의 세부 투자 내역은 이러한 고민을 잘 보여준다. 작년 국정감사 때 투자 정보 공개 범위를 확대하라는 지적을 반영해 올해 처음으로 5% 이상 지분 보유 주식의 지분율을 포함한 자산별 세부 투자 내역을 공개했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투자 다변화와 수익률 제고를 위해 기존 채권 중심 운용에서 벗어나 주식 비중을 꾸준히 늘려 왔다. 작년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보유한 국내 주식은 73조3170억 원어치에 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 4분의 1에 가까운 22.4%를 삼성전자 한 종목이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자칫 흔들릴 경우 국민연금이 곧바로 직격탄을 맞는다는 의미다. 박성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전략팀장은 “한국 주식시장에서 삼성전자 비중이 대략 22% 정도”라며 “현재 시장 구조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전체 주식시장 시가총액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종목을 일부러 뺄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식시장에서 국민연금이 투자할 수 있는 종목은 극히 한정돼 있다. 장기 투자에 적합하고 유동성이 풍부하며 수익성도 좋아야 한다. 이런 기준에 맞는 것은 주로 대형 우량주들이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데 대부분이 동의한다. 기금 400조 원대인 지금도 한국 주식시장에서 국민연금 비중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덩치가 더 커지면 대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박 팀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에 불과하다”며 “연금 자산을 국내에만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매우 큰 리스크”라고 말했다. 연금 자산은 결국 언젠가는 가입자들에게 연금으로 돌려줘야 하는 돈이다. 박 팀장은 “연금 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매력을 유지하는 것”이라며 “한국에 자산을 모두 투자해 놓으면 구매력 유지를 담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해외 금융시장에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급부상한 ‘신흥 투자가’로 주목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두각을 보인 것은 주식이나 채권이 아니라 대체 투자였다. 2005년부터 펀드를 통한 간접투자 형태로 해외 대체 투자에 첫발을 디뎠다. 연·기금들은 전통적 투자 수단인 채권과 주식 중심에서 벗어나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대체 투자를 선호한다. 또한 대체 투자는 장기 투자자인 연금의 수익률 제고 수단으로도 매력적이다. 대표적 대체 투자 자산인 부동산이나 인프라는 투자에서 자금 회수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 유동성이 극히 낮아 연금 같은 장기 투자자가 아니면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렵다. 여기에서 투자 프리미엄이 생긴다.

2009년은 국민연금의 대체 투자에서 전환점이 된 해다. 보통 대체 투자는 주식이나 채권과 다르게 포트폴리오 구축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주식이나 채권은 돈이 있으면 언제든지 시장에서 사들일 수 있지만 대체 투자는 투자 기회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 국민연금은 런던 중심부에 있는 랜드마크 빌딩인 HSBC빌딩(1조4860억 원)에 처음 단독 투자를 단행했다. 그해 하반기에는 미국 메이스리치 쇼핑몰(1520억 원)을 사들였다. 2010년 영국 개트윅 공항(1740억 원)과 미국 컬러니얼 파이프라인(1조2300억 원) 투자가 이어졌다.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 위기가 국민연금에 뜻밖의 기회를 가져다줬다. 자금난에 몰린 금융회사들이 좋은 매물을 싼값에 쏟아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기 공포감으로 선뜻 뛰어드는 투자자도 없었다. 이윤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해외대체실장은 “금융 위기 전이었다면 한국까지 투자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중동이나 싱가포르에서 기회가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해외 대체 투자 포트폴리오는 조금씩 변화해 왔다. 지역적으로는 유럽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확대됐다. 이 실장은 “전략적 판단에 따라 위기 이후 가격 조정이 빨리 이뤄진 런던에 가장 먼저 들어갔다”고 말했다. 미국은 세금이나 투자 구조가 유럽보다 까다로운 편이었다. 대부분이 파트너를 찾아 함께 투자하는 방식이 많았다. 궁합이 맞는 파트너를 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투자 대상도 랜드마크 오피스 빌딩에서 쇼핑몰과 공용 주택으로 확대했다.

해외대체투자실은 부동산과 사모펀드, 인프라 등 3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인원은 이 실장을 포함해 19명이다. 한국에서는 큰 편에 속하지만 해외 유수 연·기금과 비교하면 자산 하나를 담당하는 팀 정도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 2008년 해외대체실 직원 6명이 1조 원 안팎을 투자했다. 지금은 19명이 16조 원을 움직인다. 자산은 16배 증가했지만 운용 인원은 3배 늘어나는데 그친 셈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후 투자 기회 잡아
이 실장은 런던 개트윅 공항 투자를 가장 기억에 남는 딜로 꼽았다. 공항·상수도·배전망 등 인프라 자산은 투자 기간이 길고 정부 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따라서 해당국의 규제에 대한 철저한 사전 연구가 필수다. 개트윅 공항은 우연히 투자 기회를 잡은 경우다. 이 실장은 “다른 투자를 위해 영국 규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는데 파는 쪽에서 포기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며 “그때 개트윅 공항 건이 들어와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투자를 통해 도로·항만·다리 외에 공항도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투자청(ADIA),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호주의 퓨처펀드 등 세계적인 기관투자가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이 실장은 “이때 맺은 관계가 이후 좋은 투자 기회들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9~2010년 같은 랜드마크 딜은 크게 줄어들고 있다. 대체 투자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자금 조달이 쉬워지면서 대형 기관투자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갈수록 대체 투자 자산이 주식이나 채권시장과 연동해 움직인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리스크 분산이라는 대체 투자의 장점이 희석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민연금이 자산 운용과 관련해 공을 들이고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책임 투자다. 기금 규모가 커진데 걸맞게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할 일은 하겠다는 선언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3월 운용전략실 산하에 책임투자팀을 신설했다. 현재 6명의 팀원이 책임 투자 원칙을 자산 운용 프로세스에 도입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윤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책임투자팀장은 “선진 연·기금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며 “각 기금마다 특성이 다르고 책임 투자의 정의도 달라 국민연금에 맞는 개념 설정과 모델 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책임 투자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의결권 행사 문제다. 국민연금은 올해 주주총회에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현대모비스 이사 선임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SK C&C 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주주 가치 훼손을 이유로 동아제약의 지주사 분할과 만도의 한라건설 유상증자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자산 운용 주체별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한다. 직접 운용 주식은 국민연금이 주총 안건을 분석하고 간접 운용 주식은 위탁 운용사들에 가이드라인만 제시한다. 해외 주식은 주총 안건 분석 기관인 ISS를 주로 활용한다. 김 팀장은 “이슈가 되는 중요 사안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서 별도로 분석, 검토한다”고 말했다.

책임투자팀은 투자 결정 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항목을 사전에 평가해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함께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해 의결권 행사, 투자 배제, 간여 활동, 포커스 리스트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인터뷰 | 윤영목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운용전략실장



“해외 자산 시장 경쟁 심해져”

윤영목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운용전략실장은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 전략을 총괄하며 자산 배분을 결정하는 핵심 업무를 맡고 있다. 2001년 리서치팀이 신설될 때 창립 멤버로 합류해 주식운용실장과 채권운용실장을 모두 거쳤다.


해외 투자 때 한국 운용사들과 함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는데, 구체적인 방안이 있나.
기금은 공적 자산이다. 한국 금융사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예를 들어 해외 주식이나 채권, 대체 투자를 위해 운용사를 선정할 때 해외 운용사와 한국 운용사를 합쳐서 하면 아무래도 한국 회사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각각 리그를 나누거나 해외 운용사가 들어올 때 한국 회사와 함께 참여하게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기금 증가 속도는 어느 정도인가.
수익률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매년 적립금이 30조~40조 원씩 늘어난다. 갈수록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진다. 국민연금은 다른 선진국 연·기금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다. 아직도 성장기다.


일본 국민연금관리법인(GPIF)이 주식과 해외 투자를 늘리기로 했는데, 영향은 없나.
해외 자산 운용 시장에서 경쟁이 심해질 것이다. 그동안 일본은 보수적인 운용 원칙을 고수해 왔다. 워낙 금리 자체가 떨어지고 이런 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해 투자 다변화에 나선 것이다.


기금 분할이 필요한가.
기금 정책은 자산운용본부 소관이 아니다. 다만 현재 분할 운용하고 있는 스웨덴에서는 분할 효과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어 재검토 중이다.


금융 위기가 국민연금에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초기에는 환율 때문에 해외 투자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하지만 그 이후 대체 투자에서 오히려 덕을 봤다. 유럽 금융회사들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좋은 자산을 내놓았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경쟁이 너무 심하다. 2009년처럼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던 때는 다시 오기 어렵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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