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한국 고급차 시장서 맞붙은 두 거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 vs 디터 제체 벤츠 회장, 신차 출시 행사에 직접 출격해 일전 선언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이 국내시장에서 벌이는 전쟁이 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11월 26, 27일 마치 정면 승부하듯 국산차의 대표인 현대자동차와 수입차의 리더 격인 메르세데스-벤츠가 맞붙어 대대적인 신모델 출시 행사를 갖고 서로 힘을 과시했다. 각각 총괄회장까지 출격한 가운데 고급 세단 시장을 겨냥한 신형 제네시스와 더 뉴 S클래스를 출시했다. 현재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는 수입차 진영의 움직임과 안방 시장을 내줄 수 없다고 맞서는 국산차 진영의 첨예한 경쟁을 들여다봤다.



지난 11월 26일 현대자동차가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고 공언한 2세대 제네시스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공개했다. 신형 제네시스는 국내 대형차 시장을 빠르게 파고드는 수입차들에 맞서 대항마로 개발된 모델이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신차 개발을 위해 5년간 5000억 원을 들였다.

현대차의 야심찬 모델인 만큼 그룹 총수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직접 신모델 개발에 공을 들여 왔다. 신차 발표회에 앞서 정 회장이 직접 제네시스 신형 강판을 살피는 모습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정 회장은 신차 발표회에 직접 나서 주관함으로써 얼굴 역할도 도맡았다. 정 회장은 지난해 5월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 ‘K9’의 신차 발표회 이후 1년 6개월 만에 공식 행사에 나선 것이다. 정 회장이 직접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것은 2008년과 2009년, 1세대 제네시스와 에쿠스 출시 행사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정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이 함께 참석해 신형 제네시스 홍보에 발벗고 나섰다. 신차 발표회 현장에서는 본 행사가 열리기 한 시간 전인 오후 6시부터 정 회장을 비롯해 설영흥 부회장, 정의선 부회장 등이 입구에 일렬로 서 행사장을 찾은 귀빈을 일일이 악수를 하며 맞이했다. 또한 행사장 내에는 현대가의 맏딸 정성이 이노션 고문과 정명이 현대캐피탈 고문, 정의선 부회장의 부인 정지선 씨, 정윤이 현대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가 나란히 앉았다. 정몽구 회장의 직계 가족이 총출동한 것이다. 현대차 신차 발표회에 현대가의 모든 가족이 등장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날 행사에는 정•재계 인사와 언론인 등 1000여 명이 초청됐다. 정홍원 국무총리와 이병석 국회부의장이 축사와 격려사를 맡아 현대차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국무총리가 특정 기업의 제품 출시 행사에 참석한 것 역시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그 배경에도 관심이 쏠렸다. 에쿠스•제네시스 등 현대차의 프리미엄 모델은 국내 대기업•공공기관 등이 고정 수요층으로 상당수의 구매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차 발표회의 초청 대상은 국내 정•재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된다.

제네시스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정 회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프리미엄 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럽의 브랜드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정 회장은 “제네시스는 자동차의 본고장인 유럽을 비롯한 해외시장에 진출해 세계 명차들과 당당히 경쟁함으로써 현대차 브랜드 가치는 물론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위상을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정 회장은 신형 제네시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신형 제네시스에 적용된 초고장력 강판을 통한 안전성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췄다.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강판인 초고장력 강판을 50% 넘게 썼기 때문에 사고가 나도 충격에 강하고 고속 주행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행사 시작 전 상영된 동영상에서도 쇳물의 모습이 등장했고 최근 광고에서도 현대차의 로고를 붉고 거친 쇳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제네시스의 마케팅 캠페인이 독일의 뉘르부르크링 서킷의 콘셉트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네시스는 왜 뉘르부르크링으로 갔는가’란 광고 캠페인은 아무래도 독일 브랜드들과의 경쟁을 함축하고 있다는 평가다.


현대차는 ‘독일’, 벤츠는 ‘한국’ 내세워
한편 다음날인 11월 27일 수입 프리미엄 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최고 모델 라인인 더 뉴 S클래스 출시 행사를 가져 맞불을 놓았다.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이 행사에는 디터 제체 다임러 AG이사회 의장 및 메르세데스-벤츠카그룹 총괄회장이 독일에서 날아와 출격해 지원 사격했다. 벤츠의 총괄회장이 한국을 공식 방문해 신모델 출시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체 회장의 등장은 새로 출시되는 S클래스 판매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지만 한국에서의 대대적인 투자 계획과 사회 공헌 사업이라는 큰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로써 최근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시장을 보다 공격적으로 사로잡겠다는 전략으로 평가된다. 또한 지난 몇달간 벤츠를 둘러싼 논란으로 국내에서 손상된 이미지 회복을 위한 대응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벤츠를 비롯한 수입차 업체들이 금융 프로그램을 통한 폭리와 과도한 수리비 등으로 공정위 조사와 검찰 조사, 국정감사의 표적이 됐고 벤츠코리아의 최대 딜러사 한성자동차의 탈세 의혹이 있었다.

더 뉴 S클래스 신차 발표회와 이에 앞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제체 회장은 ‘한국’을 강조했다. 현대차가 신형 제네시스 발표회에서 독일을 전반적으로 의식하고 언급한 것과 상대적이다. 기자 간담회에서 제체 회장은 한국 시장의 중요성과 가치를 설명했고 연구•개발(R&D)센터, 물류센터 신설 등 한국 투자 계획을 밝혔다. 벤츠의 이번 행사의 콘셉트가 ‘친한(親韓)’인 만큼 서울 성산동 월드컵공원 평화 광장에서 열린 신차 발표회는 태극마크와 청사초롱 등으로 장식됐고 본 행사에서 한강의 기적, 한국의 문화유산,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 정보기술(IT) 선진국 등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만찬마저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 음식’으로 구성했고 축하 공연은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양방언의 ‘아리랑 환타지’였다.

제체 회장이 이날 밝힌 바에 따르면 현재 한국은 메르세데스-벤츠 승용 부문에서 세계 13위, E클래스와 S클래스는 세계 5위 수준이다. 벤츠 승용차는 2003년 3000대에서 현재 연간 2만 대 이상 판매되고 있다. 올해 전년 대비 21%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제체 회장은 한국 시장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한국에서는 벤츠의 고급 모델 라인업이 매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고객들은 매우 까다롭고 첨단 기술력 활용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고객 만족도에 대한 기준이 되고 있다”며 “여기(한국)서 성공하면 그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이날 제체 회장은 글로벌 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한국 시장을 겨냥한 ‘코리아 2020’을 발표했다. 한국 시장에서 2020년까지 현재 판매량을 2배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지난 10년 동안 6배로 성장한 한국 수입차 시장은 벤츠의 2020년 계획을 달성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체 회장은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이날 최초로 밝힌 메르세데스-벤츠 R&D코리아센터는 특히 텔레매틱스 분야에 집중해 한국의 첨단 기술력을 흡수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벤츠는 독일 본사의 진델핑겐 R&D센터 외에 미국•캐나다•중국•일본•인도 등 8개국에 22개의 R&D센터를 두고 있다. 또한 520억 원을 투자해 현재 짓고 있는 부품물류센터가 내년 6월께 완공될 예정이며 2100명 이상 사원과 기술자를 교육하는 트레이닝센터가 건립될 것이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사회 공헌을 위해 내년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다임러트럭코리아•메르세데스-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딜러사가 참여하는 사회 공헌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계획 등이 ‘코리아 2020’의 주요 골자다.

벤츠의 신차 발표회에는 약 1000명의 기존 고객, 협력사, 대사 등이 초청됐다. 벤츠의 구매 경험이 있는 국내 부유층 일반 고객들이 대부분 초청됐다는 점에서 정•재계 인사 중심의 현대차 행사와 차이를 가졌다. 특히 벤츠는 이날 행사에 장동건•김혜수•이정재•류현진•박찬호•박근형•장미희•김희애 등 국내 스타들을 대거 불러 벤츠의 힘을 과시했다.



현재 수입차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12%를 넘어섰다. 특히 고급차 시장은 수입차 점유율이 64%까지 높아졌다. 현대차가 신형 제네시스 발표에 남다르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바로 수입차의 공세가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지난해 ‘연 10만 대 판매량’을 넘어선 수입차 시장은 지난 10월 31일 기준으로 13만239대를 기록해 이제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이 추세라면 올해 연말까지 15만 대 판매량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고급차 시장 법인 판매 겨냥… ‘정기 인사’와도 연관
반면 현대•기아차의 내수 판매는 부진한 편이다. 올해 4월 이후 계속 전년 대비 판매량이 감소하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10월 국내에서 5만7553대를 판매해 전년 동월 대비 판매량이 6.4% 줄었다. 1~10월 연간 누적 판매량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600대 줄었다. 내수 경기 침체의 영향도 있지만 경쟁 수입차들이 지속적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며 판매 점유율을 늘리고 있어 내수 시장에서의 위험을 이제 간과할 수만은 없게 됐다.

업계는 수입차의 공격적인 마케팅, 가격 인하, 젊은층의 높아진 구매 선호도 등이 수입차의 성장을 이끈 것으로 분석했다. 수입차가 갖는 국내시장에서의 포지셔닝은 시간이 갈수록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수입차가 부의 상징이었지만 2010년부터는 ‘고연비’로 한국 소비자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는 가격도 저렴하고 실용적인 차들도 국내에 대거 출시되면서 시장 판도를 바꾸고 있다. 한편 수억 원대의 초고가 럭셔리 브랜드 역시 국내 판매량을 늘려가고 있다. 즉, 수입차 시장도 이제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성하게 됐다.

올 하반기 국내에 출시되는 신차는 모두 19종이다. 특히 연말이 될수록 프리미엄 세단 중심의 신차 발표가 집중돼 있다. 왜일까. 기본적으로 연말은 자동차 판매량이 크게 증가하는 시즌이다. 연식 변경을 앞두고 자동차 제조사들은 연말에 가격 인하, 저금리 할부 등 혜택을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연간 판매 실적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제조사로서는 연말에 소비자 한 명이라도 더 사로잡아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또한 그동안 침체였던 국내 경기가 2014년에 본격적으로 살아날 것으로 전망돼 완성차 업체들은 내년 신차 구매력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는 영향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사정을 살펴보면 12~1월 사이에 있는 기업들의 ‘정기 인사철’과도 무관하지 않다. 중대형 세단은 특히 법인 판매 비중이 높다. 이번에 출시된 신형 제네시스는 사전 계약 대수의 50% 정도가 법인 판매다. 법인 시장은 대형 세단의 주력 시장으로, 연말은 법인 판매의 최대 성수기인 것이다. 제네시스와 에쿠스 등 중대형 세단은 기업 중역들이 주로 이용하는 모델로, 연말 발표되는 인사 내용에 따라 새 임원진의 차량으로 구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입차 역시 대형 세단의 판매에서 법인 판매가 개인 판매를 웃돌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역시 같은 기간 팔린 1300대 중 1028대가 법인 판매로, 79%를 차지했다. 대기업 임원이나 공직자는 수입차를 이용하는 데 사회적 시선이 있어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자영업자와 고소득 전문직은 수입차를 선호하고 있다. 특히 수입차는 개인용 차량까지 법인용으로 구매하거나 리스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국내에서 팔린 수입차 총 13만 대 중 법인 영업용은 전체 40%가 넘는 5만4000대에 이른다. 수입차 중 법인차가 많은 까닭은 세금을 줄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만연돼 있는 이런 탈세를 근절하기 위한 관련 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에 발의돼 있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관련 법 개정안은 향후 수입차의 판매 성장세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PHOTO FOCUS
‘정•재계 거물’ 동원한 현대





11월 26일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현대 제네시스 신차 발표회에는 정홍원 국무총리를 비롯해 이병석 국회부의장, 강길부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 안홍준 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김정훈 정무위원회 위원장, 이재오 국회의원, 이희범 경총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 중앙회 회장, 신충식 농협 행장, 이순우 우리금융지주 회장,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 등 정계와 재계, 금융계 인사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친한(親韓)’ 강조한 벤츠





11월 27일 상암동 평화의 광장에서 있었던 ‘벤츠 뉴 S클래스’ 신차 발표회에는 태극마크, 청사초롱 등으로 데커레이션됐고 한강의 기적, 한국 문화 유산 등 한국의 이미지가 강조됐다. 벤츠는 기존 고객, 협력사, 대사 등 약 1000명의 참석자에게 탁 트인 넓은 공간에서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제공했다.
한편, 장동건•이정재•김혜수•박찬호•류현진•장동건•김희애•박근형 등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취재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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