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Warren Buffett] 객장서 놀던 꼬마…‘가치 투자’의 신으로
입력 2013-11-28 14:53:49
수정 2013-11-28 14:53:49
11세 때 주식 입문해 투자 원칙 배워, 그레이엄·멍거와 운명적 만남
올해 83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왕성한 투자 활동을 벌이고 있는 벅셔해서웨이의 회장 워런 버핏. 미국에 대공황이 불어 닥친 1930년에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최고의 투자가라고 불리는 버핏이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혹자는 버핏이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증권 중개인이자 훗날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낸 하워드 호만 버핏의 아들로 넉넉한 환경의 덕을 보며 성장했다.버핏은 어린 시절부터 또래들에 비해 돈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돈 버는 것에 남다른 흥미를 느껴 여섯 살 무렵부터 할아버지의 식료품 가게에서 산 껌·콜라·땅콩·팝콘 등을 다시 길거리나 야구장 등에서 팔았고 이 경험을 통해 파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이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서른다섯 전에 백만장자 되기’ 꿈 가져
아버지의 직업 덕택에 버핏은 6~7세부터 주식에 흥미를 느꼈고 여덟 살 때부터 집 서가에 꽂혀 있는 주식 관련 서적에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책에 나온 것처럼 혼자 주가의 등락을 차트로 만들기도 했다. 숫자·통계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고 마치 눈으로 사진을 찍은 것처럼 수치를 외우는 남다른 기억력도 갖고 있었던 버핏에게 주식이란 숫자들을 이용한 신비로운 마법과도 같았다.
버핏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회사인 ‘버핏 앤드 컴퍼니’에서 주식과 관련된 칼럼을 읽거나 집에선 보지 못한 책들을 읽었다. 이곳에서 훗날 버핏의 스승이자 가치 투자 이론의 창시자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증권 분석’이라는 책을 알게 되고 이를 수차례 정독했다. 또한 ‘1천 달러를 버는 1천 가지 방법’이란 책을 통해 ‘복리’라는 개념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는 버핏의 투자 인생의 밑바탕이 됐고 이 책은 버핏의 보물이 되기도 했다. 버핏은 이미 열한 살 때 오마하 공공 도서관의 투자 관련 서적을 모두 읽었을 정도로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다.
유년 시절 버핏이 했던 특별한 경험 중 하나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의 사무실 아래층에 있던 ‘해리스 업햄 앤드 컴퍼니’라는 주식거래 중개 회사의 객장을 찾는 일이었다. 버핏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주식시장 증권 시세 표시기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는 주식과 관련된 도표를 만들었고 아버지를 도와 칠판에 주가를 적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오마하로 중계되는 가격을 살펴보며 수첩에 주식 가격의 변동 사항을 기록하고 시간마다 아버지에게 이를 알려주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버핏이 인생에서 후회하고 있는 것으로 열한 살 때부터 주식을 시작한 것을 꼽은 것이다. 당시의 주식은 매우 쌌기 때문에 버핏은 다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에 주식 투자를 시작하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가 열한 살에 주식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서른다섯 살에 백만장자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버핏은 ‘1천 달러를 버는 1천 가지 방법’에 나온 ‘일단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라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아 누나 도리스를 설득해 주당 38달러를 주고 ‘시티스 서비스’라는 회사의 주식을 3주씩 샀다. 물론 부모에게 받은 돈이 아닌,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해온 아르바이트를 통해 모아둔 쌈짓돈으로 주식 투자에 입문했다.
버핏은 주식가격이 떨어질 때 누나의 원망 섞인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고 부담감과 책임감에 매일 밤잠을 설쳤다. 40달러가 됐을 때 얼른 주식을 판 버핏은 생애 첫 주식 투자를 통해 평생 동안 투자가로서의 원칙을 세우게 됐다. 투자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이미 투자한 후에는 그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성공을 확인할 수 없을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투자를 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일찌감치 부자의 꿈을 꾸며 신문배달 등을 시작한 버핏은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 투자 밑천을 마련했다. 버핏이 처음 배달한 신문은 ‘워싱턴포스트’로, 훗날 버핏은 이 신문에 1974년부터 2011년까지 37년 동안 이사직을 맡는 등 남다른 인연을 보이기도 했다. 1945년, 열다섯 살 버핏이 신문 배달로만 번 돈은 이미 2000달러(200만 원)가 넘었다.
버핏은 신문 배달, 차 대여 사업, 핀볼 게임기 사업, 주식 투자 등을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자산은 이미 6000달러(600만 원)로 늘어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있는 버핏의 사진 아래엔 ‘수학을 좋아함, 미래의 주식 중개인’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돈 벌기에 재미를 붙인 버핏은 굳이 대학에 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1년 만에 집에서 가까운 네브래스카대로 편입하게 된다. 대학 진학이 불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던 버핏은 막상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다 보니 생각이 바뀌어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하지만 바로 이 일을 계기로 버핏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하버드 대학원에 낙방한 후 우울해 하던 그는 우연히 보게 된 컬럼비아대를 소개하는 광고 전단에서 눈에 익은 두 사람의 이름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그가 닳도록 읽었던 ‘현명한 투자자’의 저자인 벤저민 그레이엄, 데이비드 도드가 교수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돈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는 현재의 주가나 시세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그 주식이 지닌 회사의 미래성과 경제성을 따지는 ‘가치 투자’의 창시자인 그레이엄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레이엄은 책을 통해 이미 버핏에게 주식 투자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알려준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버핏은 입학 지원서에 ‘두 거장은 저에게 올림푸스 산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여겨지던 분들입니다’라고 까지 쓸 정도였다.
이처럼 버핏의 인생에서 가장 손에 꼽을 만한 인물은 바로 가치 투자의 영원한 스승인 그레이엄이다. 그레이엄은 어떤 회사의 주식이 낮게 평가돼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 회사가 주식 중개인들에게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연구를 통해 숨겨진 가치를 찾아냈다. 이를 ‘몇 모금 더 피울 수 있는 담배꽁초를 찾는 일’에 비유하기도 했다.
버핏은 회사와 그들의 주식을 평가하기 위해 수치를 꼼꼼하게 이용해야 한다는 그레이엄의 철칙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주식은 기업의 일부로 봐야 하고 기업의 가치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주식 투자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버핏이 본격적으로 투자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54년, 그레이엄의 자산 운용사 그레이엄 뉴먼에서 증권 분석가로 일하면서부터다. 당시 수전 톰슨과 결혼한 후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던 터라 버핏은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스무 살에서 스물여섯 살이 되는 사이 버핏의 자산은 9800달러에서 15만 달러로 늘어나 있었다. 버핏은 돈 모으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다만 돈이 불어나는 원리를 터득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다.
스물여섯 살에 고향에 돌아온 버핏은 ‘버핏 어소시에이츠’라는 투자조합을 설립했다. 누나와 친구, 주변 인맥 7명을 총동원해 그가 마련한 자금은 10만 달러였다. 버핏 투자조합은 1969년 문을 닫았는데 설립 초기부터 해산할 때까지 연평균 29.5%의 놀라운 복리 수익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다우지수의 상승률은 연간 7.4%에 불과했다.
1959년에는 버핏의 인생에서 빠져선 안 될 인물이 등장한다. 지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게 된 찰리 멍거가 그 주인공이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경력을 쌓고 있던 멍거는 버핏에게 자극을 받아 전문적인 투자자의 길로 들어섰다. 버핏에게 멍거는 일생의 사업 동반자이자 훌륭한 멘토다. 벅셔해서웨이 초기 성공의 큰 동력으로 꼽히는 블루칩 스탬스, 시즈캔디즈 등 캘리포니아에서 기업들을 인수할 때 두 사람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버핏은 “그레이엄의 가르침과 달리 멍거는 염가 주식만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줬다”며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스승이라고까지 말한다.
1962년은 버핏의 투자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해로 기록된다. 서른두 살이 된 버핏은 당초 목표보다 3년이나 앞당겨 꿈에 그리던 백만장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부터 주식 투자뿐만 아니라 회사 자체를 매입해 수익을 내겠다는 또 다른 ‘부의 목표’를 설정했다. 버핏은 망해 가는 섬유회사 벅셔해서웨이의 주식을 대거 사들인 후 투자 지주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스승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바에 따르면 버핏의 눈에 벅셔해서웨이는 ‘숨은 보석’처럼 보였다. 1965년 버핏이 경영권을 잡은 후 벅셔해서웨이는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했다. 1962년 버핏이 벅셔해서웨이를 인수할 당시 18달러에 불과했던 주가는 현재 17만 달러를 웃돌고 있다.
빌 게이츠와 친해도 IT 투자는 ‘No’
포스브는 1985년에 쉰다섯 살이 된 버핏을 처음으로 미국의 억만장자 목록에 올렸다. 버핏의 명성은 금융을 뛰어넘어 경제 전반에 퍼지게 됐다. 다른 투자자들이 못보고 지나치는 유망 기업을 알아보는 능력 덕에 버핏은 이때부터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게 된다. 월스트리트 사정에 밝은 이들은 버핏의 일거수일투족, 투자 현황 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투자자들 중에는 그가 준비한 벅셔해서웨이의 연례 보고서를 받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 회사의 주식을 사는 이도 있었다.
버핏은 ‘가치 투자’원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 보험회사 가이코·버펄로이브닝뉴스·퍼니처마트·코카콜라 등의 주식을 매입했다. 1990년대가 되자 버핏은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데 더욱 매진했다. 당시 다른 투자자들이 정보기술(IT) 산업에 관심을 보이며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의 닷컴 기업에 돈을 쏟아부을 때 버핏은 카펫·벽돌·가구·보석 등 생활 밀착형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투자했다. 빌 게이츠와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음에도 IT 기업의 투자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고 당시 투자자들은 버핏을 ‘한물간 노인네’로 치부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이 꺼지고 컴퓨터 관련 기업들의 주식이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칠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되기도 했다.
버핏은 2008년 금융 위기 당시에도 골드만삭스에 투자해 획득한 워런트(주식 매입 권리)를 통해 21억 달러(약 2조3102억 원)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월가는 지금도 오마하의 작은 집에 사는 소박한 노인 버핏이 어떤 주식에 투자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버핏이 존경받는 이유
대개 부자들은 ‘돈만 밝히는 냉혈한’으로 치부되곤 한다. 부자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워런 버핏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부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를 ‘오마하의 현인’으로 부르며 존경심을 표한다. 동네 아저씨 같은 차림새에 검소한 생활 태도, 통 큰 기부 의식 등 돈을 잘 벌기도 하지만 잘 쓰는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다.
2006년 버핏은 또 한 번 뉴스의 주인공이 됐다. 이번에는 ‘투자’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단계적으로 자신의 재산 99%를 기부하겠다고 공언했고 가장 큰 몫은 절친한 친구 빌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넘기겠다고 밝혔다. 2006년부터 버핏이 낸 누적 기부액은 올해분을 포함해 170억 달러, 약 19조4000억 원을 넘었다. 버핏은 기부를 발표하기 10여 년 전부터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버핏은 자신과 같은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에 대해 스스로 납세 신고서를 작성하고 세금을 빠뜨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열세 살 무렵에 제출한 첫 납세 신고서를 보관할 정도다. 여느 자산가와 달리 버핏은 일찌감치 세 자녀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돈 대신 ‘자신감’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줬고 큰아들 하워드 버핏은 농부로, 막내아들 피터 버핏은 음악가로 살고 있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