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사람 맛난 인생] “셰프로 불릴 때가 가장 행복하죠”

‘글로벌 중식’개척하는 여경래 한국중국요리협회 회장


여경래. 그는 음식 업계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중국 음식 요리사다. 중식 요리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겐 국민 가수 ‘조용필’에 해당한다.

그에겐 직함이 여러 개 있다.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호텔 홍보각의 오너 셰프를 필두로 서울 광화문과 마포의 ‘루이’레스토랑과 충무로 ‘수엔’레스토랑의 대표 등. 무려 음식점 네 곳의 대표다. 여기에 한국중국요리협회 회장, 제15대 한국화교조리사협회 회장, 세계중국요리연합회 조리명인 및 집행위원, 국제 중국요리명인교류협회 부회장, 한국조리사회중앙회 부회장 등이 더해진다. 여기까지 요약하면 중국 요리에 관한 한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스타란 얘기다. 그래도 아직 직함이 남아 있다. 이금기 소스의 기술고문, 인천문예대를 비롯한 이런저런 대학의 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다. 직함 하나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직함이 많다는 건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아니다. 직함 하나하나의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있다.

1주일에 두세 번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 장 보는 일을 한다. 그는 셰프이기 때문이다.

“어떤 직함보다 셰프로 불리는 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제 근본이 요리사이니까요. 셰프는 주방을 장악해야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의 수급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정보는 새벽 시장에서 얻을 수 있거든요.”

물론 거래처에 주문해 받아 쓰는 재료도 많다. 하지만 주방의 긴장감을 놓지 않기 위해 직접 장을 본다고 한다.

국제적인 직함이 많다 보니 요즘은 서울을 떠나 있는 시간도 적지 않다. 베이징 요리대회 심사위원으로 초청받기도 하고 홍콩이나 마카오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불려가기도 한다. 1박 2일, 2박 3일 벼락치기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다. 대학 강의까지 맡고 있어 몸이 두세 개라도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 쪼개기가 녹녹하지 않다. 그래도 강의가 끝나고 나면 학생들로부터 받는 교수 강의 평가에서 톱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여 셰프는 대만 국적의 화교 2세다. 1960년 경기도 수원에서 중국 산둥성이 고향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여섯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어렵게 자랐다.


중식 업계 휩쓴 ‘형제 요리사’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묻자 “군 빵”이란 답이 돌아왔다. 중국식 빵인데 소도 없이 밀가루를 얇게 밀어 양면을 노릇하게 구운 것이다. 인도 음식인 난(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과 비슷한 것인가 보다. 밥 대신 먹는데 반찬은 집에서 재배하던 부추를 볶아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고등어자반이 올라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모두 학비는커녕 교복도 못 사 입고 다닐 정도로 어려웠다.

“어머니께서 너는 중국 사람의 자손이니 중국 요리 기술을 배우라고 하면서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에서 내려온 ‘왕서방’을 따라 올려 보냈어요.”



도착한 곳은 노량진의 한 중국집. 남들이 고등학교 교실에서 교과서를 펼 때 그는 칼을 들고 양파를 까며 요리 기술을 바닥부터 익혔다. 중식 요리사로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가자 ‘신의 한 수’를 가르쳐 주는 스승님도 만나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항지 선생님, 미국으로 들어가신 왕출량 선생님이 대표적이죠. 재빠르고 정교한 손기술과 화려한 장식 기술을 갖춘 분들이죠. 혼자 터득하려면 한참 걸릴 것들을 스승님들의 한 수 지도로 이른 시간에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요리를 배우지 않았으면 만화가나 화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여 셰프. 눈썰미가 좋아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요리를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바로 화장실에 가서 그림으로 옮겼다고 한다.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이 화장실에서 엉뚱한 짓(?)을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무시하고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마무리했다.

“중국집에서 일한 지 한 5년이 지나자 ‘이게 내 천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1982년 월급 60만 원을 받고 크라운호텔 중식당으로 이동한다. 6000원짜리 월급으로 시작한 인생이 불과 5년 만에 100배로 뛴 것이다. 당시 60만 원이면 대기업 대졸 초봉 월급의 두 배가 훌쩍 넘는 금액이다. 게다가 주방장 다음 부주방장의 직책으로 아래에 20여 명의 요리사를 두게 된다.

여 셰프에겐 세 살 아래 동생이 한 명 있다. 그와의 대화에선 그 동생이 자주 등장한다.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의 여경옥 씨가 바로 그의 동생이다.

“저도 아버지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데…, 동생은 어떻겠어요?” 여 셰프의 기억에 아버지 모습이 여섯 살에 끝났으니 세 살짜리 동생 경옥에겐 아버지가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동생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국집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사실 제가 형, 아니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이끈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동안 제 말을 잘 듣고 따라줘 고마울 따름이죠.”



똑같은 길이지만 앞서 길을 내는 형이 훨씬 힘들었을 게다. 그래도 열심히 뒤따르는 동생이 있어 힘든 줄도 몰랐단다. 형은 일찌감치 자영업에 뛰어들었지만 동생은 20년 넘게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에 있으면서 수석 주방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2007년 어느 날 신라호텔에서 잘나가던 동생이 광화문에 중식 레스토랑을 오픈한다. 형이 불러낸 것이다.

“음식점의 월급쟁이 생활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 인건비가 비싼 주방장부터 정리하는 게 이곳의 생리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함께 사업을 하자고 했죠. 그래서 오픈한 곳이 광화문점 ‘루이’입니다.”

루이(Lui)는 여(呂)의 광둥식 발음. 동생과 함께 사업을 하니 이(i)를 하나 더 붙여 루이(Luii)란 상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생을 배려하는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광화문점 ‘루이’가 히트를 치자 마포점, 이어서 둘의 아호를 딴 충무로의 ‘수엔’까지 문을 연다. 여기까지는 형의 뜻에 잘 따르던 동생이 올해 초 반란을 일으킨다. 형의 뜻을 꺾고 ‘제 갈 길’로 나선 사건이 벌어진 것.

“롯데호텔로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제가 말렸지요. 사업도 잘 되는데 그냥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고집을 부리며 ‘도림’의 총책임자로 이사 직함을 받고 들어가더라고요.” 당시는 말을 듣지 않은 동생한테 무척 섭섭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은근히 부러운 눈치다.

“직장 나름일 텐데 옆에서 보니 롯데호텔에서 이런저런 배려를 많이 해주더라고요. 나도 어디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면 들어가 볼까요? 하하하.”

여 셰프가 동생을 칭할 땐 ‘여 이사’도 아니고, ‘경옥이’도 아니다. 그냥 동생이다. “동생이… 동생은… 동생을… 동생에게….” 이런 식이다. 아직도 경래 형에겐 경옥은 동생 그 자체인 것이다.

자신이 있는 요리를 물으니 “탕수육 한 번 먹어보라”며 바로 튀겨 내온다. 튀김옷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바삭거린다. 소스는 새콤달콤한 게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파인애플도 넉넉하게 들어가 소화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보통 중국집에선 탕수육을 두 차례 튀기는데 저는 한 번에 끝내요. 튀기는 도중에 한꺼번에 건져 올려 국자로 쳐주면서 공기를 빼고 다시 튀기는 방식이지요. 튀김옷에 계란을 넣어 바삭함을 높인 부분도 있고요.”



화교 요리사 시대는 끝났다
짬뽕 국물도 내놓았다. 고추기름이 둥둥 떠다니지 않는다. 걸쭉한 붉은 국물이 무척 차분하다. 고춧가루의 색이 육수랑 완전한 한 몸이 됐다.

“해산물·고기·채소가 제대로 어우러지면 조미료를 넣을 필요도 없어요. 고운 고춧가루를 기름에 볶아 육수를 3분의 1씩 나눠 붓고 오랜 시간 조리면 한국식 표현의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맛이 완성되죠.”

탕수육과 짬뽕. 40년 가까운 요리 경력자 치곤 무척 소박한 주특기 메뉴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해진다. 앰배서더호텔의 홍보각을 찾는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찾는 ‘불도장’이 있다. 불도장은 ‘맛있는 냄새에 끌려 스님이 담장을 넘었다’는 뜻을 가진 메뉴. 상어지느러미 등 상당히 비싼 재료가 들어가고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예약 주문이 필수다. 일반인들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음식이란 얘기다. 그런데 여 셰프는 상어지느러미 등 고액 재료를 빼고 전복·송이버섯·새우·오골계 등으로 맛을 내며 가격 거품을 확 뺐다. 그리고 예약 주문 없이도 먹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원하는 손님들에게 바로바로 내놓았다. 이제 불도장은 ‘여경래, 여경옥 형제 셰프의 스태미나 건강식’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여 셰프는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주방을 얻어 쓰는 일이 쉽지 않은 것도 있지만 실제는 아내의 요리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나 얼씬도 안 하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 대신 어머니와 함께 가족들을 호텔로 불러 제 요리를 맛보이죠. 그게 훨씬 편하고 폼도 나요. 외식이 귀찮을 땐 집에서 가까운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배달 자장면을 시켜 먹기도 해요.”

음식점을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다. 가족과 외식할 땐 어머니와 아내가 좋아하는 곳이면 오케이. 그래서 연남동에 있는 수제비 집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직원들과 회식할 때는 마장동의 고기구이집이 단골이란다. 그러면서 “집이나 직장 근처에 맛있는 집이 있는 것도 큰 복”이라고 말하는, 소박한 사람이 여 셰프다.

요즘 그가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요리보다 한국인 중식 요리사 양성이다. 방법이 재미나다. 자신이 고문으로 일하는 이금기 소스와 함께 전국 조리학교 중식 요리 대회를 열고 있는 것. 참여 학교가 7년 전 4개교에 불과하던 것이 올해는 44개교로 늘었다. 대회 참가 인원으로 따지면 1만 명이 훌쩍 넘는다.

“각각의 학교에서 우승한 학생 44명을 데리고 겨울방학에 홍콩으로 여행을 떠나요. 중식의 미래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죠.”

그는 화교 중심의 중식 요리사 시대가 곧 끝난다고 했다. ‘철가방’ 중국집 역시 동네 별미 분식집에 그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한때 ‘청요리’로 각광받는 중국 요리의 시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그 중심엔 화교 요리사가 아닌 한국인 중식 요리사가 서 있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제가 중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화교 요리사들이 주방을 장악했죠. 그런데 요즘은 한국인 요리사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것도 전문대 이상을 졸업한 고학력자들이죠. 중국말도 척척 잘합니다. 더 이상 화교들만의 영역이 아니란 얘기죠.”

세계 속의 중식 역시 홍등으로 대표되는 예전의 중식이 아니다. 젠 스타일의 인테리어, 재즈가 흐르는 공간, 프랑스·이탈리아·일본식이 혼재된 음식으로 변신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 요리 같지 않은 중국 요리, 영역 구분이 없는 ‘글로벌 중식’이 대세입니다. 이런 중식 문화가 한국 땅에서 서서히 퍼지고 있어요.”

최근 여 셰프의 행보는 결국 ‘한국 땅에서 싸구려 이미지를 벗어버린 고급 글로벌 중국 음식의 정착’을 재촉하고 있는 것. 그의 말대로 ‘촌놈 출세한 인생’의 명함에 어떤 직함이 추가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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