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단종 앞둔 다마스·라보의 반란

23년 국민차… ‘돈 안 되는 차는 서럽습니다’

다마스와 라보가 올해 말을 끝으로 단종된다. 둘 다 주로 골목길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차들이다. 두 달 앞으로 작별의 시기가 다가오면서 두고만 볼 수 없는 소상공인들은 다마스와 라보 살리기에 나섰다. 정부도, 기업도 서로 손놓고 ‘네 탓’만 하고 있으니 그들이 힘을 합친 것이다. 누군가는 “차 하나 단종되는 게 무슨 큰일이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한 가정을 일구고 가장의 어깨를 펴게 해준 ‘자산 목록 1호’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돈을 벌어주진 못해도 식탁에 웃음꽃 피게 도와준 ‘달리는 효자’라고 말한다. 당장 생산이 중단된다면 더 이상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차량이 없다는 게 문제다. ‘최장수 모델’이자 ‘최저가 차량’ 또한 ‘최후의 경상용차’인 다마스와 라보….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은 걸까.



오전 9시 을지로 명보극장 앞 양 길가에는 다마스가 줄지어 서 있다. 공구·인쇄 등 도매 상가 밀집 지역에서 배달 물량을 기다리는 차다. 좁은 골목 양쪽에 차들이 들어설 수 있는 건 폭이 좁은 다마스이기에 가능한 진풍경이다.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는 김명곤(67) 씨는 5년 전부터 배달업에 종사하고 있다. 노후에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다. 월소득 60만 원에서 가스 값 등 차량 유지비로 20만 원 이상 쓰고 나면 4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이 남는다. 적은 소득이지만 그는 “혼자 벌어 혼자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런데 만약 다른 차로 갈아 타야 한다면 좀 걱정이 될 것 같다”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핸들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왕봉옥(56) 씨는 20년간 다마스만 애용했다. 저렴한 차량비와 유지비로 다른 차는 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종종 고장이 나긴 했지만 큰돈 들이지 않고 수리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비싸고 좋은 차라고 하더라도 좁은 골목을 지나다닐 수 없어 ‘헛똑똑이’이지만 다마스만큼은 왕 씨의 ‘발’이 되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아주 소중하죠. 서운한 정도로는 표현이 안 돼요.”

다마스와 라보가 ‘소상공인의 친구’로 불리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저렴한 가격이 장점이다. 1991년 첫 출시 때 400만 원대로 출발해 2013년 현재 둘 다 1000만 원 미만의 ‘최저가 모델’이다. 국내 유일의 경상용차로, 모든 차종이 경차(경차는 레이·스파크 등 경승용차와 다마스·라보 등 경상용차로 분류됨) 혜택을 받는다. 액화석유가스(LPG)를 사용하고 유지비가 비교적 적게 들어 소상공인들에게 ‘돈 벌어주는 차’로 통했다.

무엇보다 임무에 충실한 안성맞춤형이다. 이 차를 드라이브용으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재 공간이 넓은 데 비해 좁은 길도 쑥쑥 오갈 수 있어 짐을 나르는 데 최적이다. 또한 차를 개조해 물건을 파는 데도 유용하게 쓰여 ‘생계형 차종’이자 ‘다목적 차량’으로 불린다. 용달화물업·택배업·세탁업·유통업·화원업·농업·이동요식업·인쇄업 등 종사자가 주요 고객들로 1991년 이후 총 30만 대 이상 팔렸다. 흥미롭게도 두 차의 이름은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마스(Damas)는 스페인어로 ‘친한 친구’이고 라보(Labo)는 그리스어로 ‘일하다’라는 뜻이다. 존재 목적과 소비자 층이 확실한 이 차가 왜 생산 중단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에서 ‘안전 및 환경 규제’를 강화했는데, 기업에선 ‘개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더 이상 생산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마침 그 규제가 내년 초부터 시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올해 말로 단종 시기가 정해지게 된 것이다.


소상공인의 친구…시한 앞두고 판매 급증 ‘기현상’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총 4가지 규제가 걸린다. 안전 규제 3가지와 환경 규제 1가지로(표 참고), 각각 국토교통부와 환경부 소관 법규다. 이 중 단종 결정의 핵심 사유는 자동차 안정성 제어장치(ESC)다. 코너를 돌 때 차가 흔들리지 않도록 바퀴에 전자 센서를 장착해 제어하는 기술인데, 이를 개발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이유다. 한국GM은 종합 설계에 반영해야 할 내용이라 신차 개발 수준, 약 2000억~3000억 원에 비견되는 비용이 소요된다고 밝혔다. 연간 1만5000대 판매한다고 가정하면 연 매출액이 1350억 원 수준이고 2년간 매출액을 쏟아부어야 겨우 충당할 수 있어 투자가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올해 초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이 처음 공식 언급했고 이제 생산 종료 시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흥미롭게도 두 차의 이름은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마스(Damas)는 스페인어로 ‘친한 친구’이고 라보(Labo)는 그리스어로 ‘일하다’라는 뜻이다.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판매 시장에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차를 앞당겨 구입하려는 수요자가 몰려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10월 한 달 판매량만 2554대로 지난해와 비교해 81% 증가했다.

중고차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중고차 업체 SK엔카는 올해 10월까지 다마스와 라보 등록 대수가 4980대, 1759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3배, 2.6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가격 상승을 염두에 두고 일부 중고차 딜러와 택배 업체를 중심으로 ‘사재기’하면서 ‘다마스 재테크’ 용어까지 등장할 태세다.

다마스와 라보의 단종은 단지 차종이 아닌 ‘경상용차’라는 장르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국내 경상용차의 등장은 1983년 정부의 국민차 보급 추진 계획에 따라 시작됐다. 일본 스즈키자동차의 모델을 따라 1991년 당시 대우자동차에 의해 처음 ‘다마스·라보 형제’가 생산됐다. ‘작은 차, 큰 기쁨’, ‘앞마당까지 들어오는 차’ 등 광고로 인기를 끌었고 출시 1년 만에 2만 대 판매를 돌파했다. 시장이 생기자 경쟁자도 등장했다. 당시 아시아자동차의 ‘타우너’가 가세했고 삼성자동차에서도 비슷한 모델을 내놓았다. 하지만 2002년 타우너 생산이 중단되면서 다마스와 라보가 경승용차의 명맥을 이어 왔다.

다른 곳이 발을 빼는 동안 한국GM이 지금까지 라인을 지켜 왔던 것은 창원 공장의 특수성 때문이다. 처음부터 경차에 맞게 설계된 공장으로 마티즈·스파크 등 인기 경차를 메인 생산 라인으로 가지고 있어 경상용차를 계속 생산하는 데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았다. 한 라인에서 다마스와 스파크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로 탄력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 반면 일정 수요가 꾸준히 있었기 때문에 수익이 괜찮았던 것이다. 이 두 차는 대우차 창원공장의 시작과 맥을 같이해 왔으며 2011년 대우차에서 한국GM으로 바뀐 이후 대우차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의미도 갖는다. 더 넓게는 설계 당시 모습을 유지해 온 단일 모델로서 국내 ‘최고령차’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의미를 갖는 다마스와 라보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상황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이들은 바로 정부도 정치권도 기업도 시민단체도 아닌 소상공인들이다. 인터넷 카페에서 개인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다가 지난 7월 ‘생계형 경상용차 단종 철회 청원자 협의회’가 결성돼 본격적으로 단종 철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용달화물자동차운송사업연합회·전국유통상인연합회·한국세탁업중앙회 등 11개의 크고 작은 모임이 힘을 합쳤다. 이후 청와대·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단종 철회 청원서를 제출하고 국토교통부 주관 간담회 참석, 한국GM 본사 방문 간담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마스와 라보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11월 들어 소상공인연합회도 성명서를 내는 등 힘을 합쳤다. 때마침 국정감사 시즌을 만나 일부 정치권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지난 10월 중순 국토부와 환경부는 지난주 한국GM 측에 “규제 유예를 위한 조건을 수용할지 검토해 달라”고 알렸고 10월 말 호샤 사장은 “다마스와 라보 생산 연장을 놓고 정부 등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협의 중’인 상태인데, 현재 어디까지 논의된 것일까. 한국GM 관계자는 “긍정적으로 검토할 계획이 있지만 ESC 개발은 추가 장치를 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아 개발이 거의 불가능하다”며 “기본적인 입장은 단종으로 보고 있다. 부처에서 아직 얘기해 준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단종을 안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단종을 하고 안 하고는 회사 결정인데, 일단 소상공인의 의견을 전달하고 생산 방안이 있는지 검토해 달라고 했다”며 “어떤 안전 확보 방안을 가져오는지를 보고 검토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하면 양쪽 다 ‘살리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공을 떠넘기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단종된다면 당장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대체 차량이 없다는 것이다. 시중에 있는 다마스·라보가 수명이 다했을 때 수요자들의 선택지는 없다. 심언태 전국용달화물자동차운송 상무는 “회원사 10만 명 중에 2만 명 정도가 다마스·라보를 이용하는데, 소량 다품종으로 화물 종류가 많아지면서 경상용차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경상용차가 없다면 불필요하게 1톤 이상 차량을 사야 한다. 차량비와 유지비가 ‘두 배’이고 경차 혜택도 없어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다양한 차종이 있다면 단종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분명한 수요자 시장이 있는데 공급자 시장이 증발해 버리는 상황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단종 철회 청원 이어져…중국 기업 진출설도
해외 완성차 업체에 경상용차 시장을 완전히 뺏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완성차 업체들이 이미 틈새시장을 노리고 한국을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 차종으로 상용차 시장에 진출한다는 정보가 있다. 실제로 이미 국내에서 0.75톤 트럭이 국내에서 테스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고가 차종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특히 중저가 모델을 전략 차종으로 선택했다는 것. 한국 시장을 발판 삼아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 온 중국에 문을 활짝 열어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단종과 함께 생업에 타격을 입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133여 개 다마스·라보 생산 협력 업체와 전국 대리점 영업소 직원들이다. 물론 다른 경차 부품을 생산하는 길이 있지만 125개 중소기업에서 재빠르게 부품 대응을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 무엇보다 다마스로 영업 네트워크를 구축해 온 판매왕들은 당장 앞길이 캄캄하다.

그렇다면 단종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걸까. 현재 가장 현실성 높은 해결책은 ‘조건부 유예’로 좁혀진다. 기간을 연장해 주고 그 사이 기술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토부는 유예를, 한국GM은 투자를, 소비자는 일정 부분 가격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민할 수 있는 가격 문제에서도 대체 차종이 없어 가격이 두 배로 뛰는 것보다 소폭의 가격 인상이 더 낫다는 게 청원자협의회의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투자’ 없는 ‘유예’는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1~2년 단종이 유예된다고 해도 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이다. 투자는 의지의 문제로, 시간과 비용을 한국GM이 주장한 것보다 덜 들여 충분히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6개월 정도 유예 기간을 주면 국내의 관련 기술을 가진 업체가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며 “2000억 원이 아니라 100억 원 이하로도 모두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시나리오대로 흐른다면 투자하더라도 차량 가격 상승을 통해 유지비용도 마련할 수 있다. 연간 1만3000여 대 이상 꾸준한 수요가 있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마저도 어렵다면 생산 라인을 팔면 된다”며 “라인을 살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단종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한국GM이 ‘처음부터 단종시킬 계획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단종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2009년부터 강화된 규제가 예고돼 있었는데 그 사이 업그레이드 등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로 꼽힌다. 또한 한국GM이 2011년 쉐보레 브랜드를 달 때 유일하게 빠진 차종이 바로 다마스와 라보다. 제조사 엠블럼이 붙어 있지 않은 경우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로, 현재 다마스는 대우도 쉐보레도 아닌 DAMAS를, 라보는 LABO 마크를 달고 있다. 수익성을 지속적로 낼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책이 있는 데도 계속해 단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내놓을 때는 단종 수순을 밟기 위한 핑계였다는 게 분명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생산 유지는 의지의 문제…‘소비자 홀대’ 지적도
한국GM은 현재 스파크를 다마스·라보와 같은 창원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혼류 생산 방식으로 한 라인에서 여러 차종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진이 적은 경상용차보다 잘나가는 전기차를 생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 한국GM 관계자는 “단종 이후 라인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스파크 생산에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물론 현대·기아차도 일찍이 발을 뺀 시장에서 혼자 남은 한국GM이 다소 억울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기업이 수익성에 따라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기업의 전략적 판단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산업에 비해 자동차는 공공성이 강조되는 산업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업 윤리와 공공성이 덜 강조되고 있는 현 상황은 ‘돈 안 되는 차’는 홀대하는 문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다마스와 라보는 2007년 한 차례 뉴 모델이 나온 것 말고는 23년간 신규 투자나 연구·개발이 없었다. 기아차의 타우너도 같은 수순을 밟아 결국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단종됐다. 김필수 교수는 “국내 자동차 문화가 일부 대형차 위주의 절름발이 형태”라고 꼬집는다. 기업이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서민층을 배려하는 등의 다양한 모델이 존재하지 않고 수익성이 좋지 않으면 단종도 거리낌 없이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시장에서는 소비자의 영향력이 강해 특정 수요가 있는 모델을 함부로 없앨 수 없다”며 돈 안 되는 차를 홀대하는 데는 소비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얕보는’ 심리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한 여기에는 소비자가 아닌 제조업자 중심의 법규와 정책도 한몫하고 있다. 단종 이슈가 나올 때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슈를 제기할 만한 정책 당국과 시민단체의 전문가 및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다. 이는 국내 자동차 업계에 시사점을 던진다.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시장이라도 언제든지 돈이 안 되면 사장될 수 있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선진국형 패러다임에 역행하는 모습이다. 다마스와 라보의 단종이 일부 생계형 자영업자, 그들만의 사정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모로 ‘작은 자’에 속하는 다마스와 라보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역습이다.


글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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