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돗자리 짜고 짚신 삼던 자가 황제 된다고?”

출신 성분 코드

미당 서정주는 23세가 되던 해(1937년)에 지은 그의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물론 ‘애비는 종이었다’는 말에는 실제 미당의 선친이 머슴이었다는 뜻과 일제강점기에 노예로 전락한 식민지 백성을 가리키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어쨌거나 미당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1571 ~1610년)도 서정주와 비슷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하층 계급 출신의 아버지를 둔 것이 못내 부끄러워 절치부심한다. 카라바조는 기어이 기사단에 편입하고 추기경의 후원도 따내는 등 신분 세탁에 성공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의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어떤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 콤플렉스가 얼마나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지는 모른다.” 특히 사회적 지위나 신분은 날 때부터 운명처럼 한 개인의 일생을 가름한다. 그런 만큼 출신 성분과 관련된 콤플렉스보다 영향력이 큰 콤플렉스도 드물다.

명문 사대부 가문이 즐비한 조선시대에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가 열등감이 없었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적장자(嫡長子)도 아닌 서얼 출신의 방계 혈통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선조도, 선조의 후궁 차남이었던 광해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조 사회에서 근현대 사회로 넘어와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 즉 왕손이라는 신분 의식과 미 프린스턴대 박사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더욱 뜻밖인 것은 항일 독립 투쟁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백범 김구 선생이다. 다소 불경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백범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게 전부였다는 학력 콤플렉스와 하층민 출신이라는 이중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운 신분 콤플렉스
촉한(蜀漢) 정통론의 신봉자인 나관중의 편견도 작용했겠지만, 유비와 관련 있는 인물들은 대체로 호의적으로 묘사된다. 출신 성분과 관련해 별다른 콤플렉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비는 비록 돗자리를 짜고 짚신을 삼아 팔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 몰락한 귀족이다. 그러나 황족의 후예라는 자긍심이 있었다. 유비는 전한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劉勝)의 직계 자손이다. 유비를 만난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는 족보를 따져보고 크게 기뻐했다.

“현덕공! 그대가 짐의 숙부뻘이 아니요?” 그 뒤로 세상 사람들이 유비를 황제의 숙부라는 뜻의 유황숙(劉皇叔)으로 불렀다고 한다.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 공명은 본래 평민으로 남양에서 밭을 갈며 지냈습니다. 난세에 생명이나 보전하며 지냈을 뿐 제후에게 이름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공명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지방관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장인 황승언은 이름난 지방 호족이었다. 장비 역시 나관중의 소설에서는 단순 무식하면서도 의리 있는 백정 출신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재력 있는 좋은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가 남긴 시와 문장이 지금도 전해 온다.

나관중은 촉나라 이외의 인물에 대해서는 각종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문제적 인물로 묘사하는데 일순의 주저함이 없다. 같은 콤플렉스라도 원소와 원술 형제와 같은 우월 콤플렉스는 그래도 좀 낫다. 그들은 4대에 걸쳐 3공의 벼슬을 역임한 ‘삼국지’ 시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다. 하지만 집안만 좋았을 뿐 워낙 타고난 자질과 품성이 부족했다. 다만 성정이 극도로 포악하거나 잔인하지는 않았다. 물론 원술이 그의 이복형인 원소와 사이가 틀어지자 “원소 저자는 내 형이긴 하지만 첩의 아들에 불과해!”라면서 적자(嫡子)로서의 복합적 우월감을 드러낸 적은 있다. 자신들의 무능함 때문에 ‘삼국지’ 초반부에 사라지긴 했지만 원소와 원술 형제의 머릿속에 유비와 조조는 애초부터 들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돗자리나 짜고 짚신이나 삼던 자가 황제가 되겠다고?”, “환관의 자식이 천하의 패권을 넘본다는 게 말이나 될 소리야?”

반면에 열등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흡사 ‘상처 입은 맹수’라고 할 수 있다. 극도로 예민한데다가 의심까지 많아 잘못 건드렸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조조는 환관의 자손이라는 뿌리 깊은 열등감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조숭이 환관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그는 환관 아닌 환관의 자손이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벼슬길에 오르기는 했지만 명문가 출신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 앞에서 기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처 입은 맹수’ 조조의 열등감
조조가 20대 초에 낙양의 북문을 경비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건석(蹇碩)이라는 환관의 친척이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자 그 자리에서 몽둥이로 쳐 죽였다. 실로 대담무쌍한 일었다. 건석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열 명의 환관인 십상시(十常侍) 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또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도주하는 과정에 아버지 조숭과 의형제를 맺은 여백사의 집에 잠시 묵게 된다. 여백사 가족이 자신에게 대접할 돼지를 잡기 위해 칼을 갈자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한 조조는 여백사 가족을 무참히 도륙한다. 술을 사러 갔다 오는 여백사마저 확인 사살한다. 그러고는 함께 있던 진궁에게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처 입은 이리와 같은 난세의 간웅(奸雄) 조조의 퍼스낼리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오나라 손권이 아끼던 용장 감녕(甘寧)은 원래 오나라와는 대립 관계에 있던 유표 수하의 장수 황조(黃祖)의 부하였다. 손권의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감녕은 손권의 부하 능조를 사살하는 등 큰 공을 세웠지만 황조는 이를 알아주지 알았다. 남자는 원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는데 말이다. 더구나 황조는 감녕이 원래 양자강을 오르내리며 도적질을 하던 수적(水賊) 출신이라고 업신여겨 끝내 중용하지 않았다. 감녕은 결국 손권에게로 갔고 주유와 여몽의 추천으로 중용된다. 감녕의 신분 콤플렉스를 자극했던 황조는 손권의 명령으로 황조 토벌에 나선 감녕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사족: “콤플렉스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줄은 모른다”는 칼 융의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도 그렇지 않은가. 초나라 장군을 지낸 명문가 출신 항우와 달리 빈농 출신에다 무식한 건달패인 유협(遊俠) 출신의 한고조 유방. 역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배운 것도 없이 도적떼(홍건적)의 반란에 합류했다가 명나라를 건국했던 명태조 주원장. 유방과 주원장이 건국 후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똑똑하고 가문도 좋은 건국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이면에는 자신들의 하찮은 출신 성분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열등 콤플렉스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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