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모바일 집중 스타트업 다양한 분야로 확대돼야”
한국 경제의 성장 둔화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제로 성장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제까지 고도성장의 밑바탕이 대기업 제조업 위주의 모방 경제였다면 이제는 벤처·중소기업 중심의 창조 경제로 성장 동력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창조 경제 시대에는 젊은 인재들이 대기업 입사에 목을 매는 대신 ‘창업 국가’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처럼 혁신 기술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벤처 창업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과도기에 있는 한국 경제가 건강한 벤처 생태계 조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한경비즈니스는 벤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벤처 업계 대부들과 ‘벤처 생태계 발전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또한 새롭게 벤처 생태계의 플랫폼으로 떠오른 D캠프의 현장을 취재했다.이제 걸음마를 시작했거나 막 걷기 시작하는 스타트업은 성장을 위한 양분으로 투자와 멘토링이 절실하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 추진 움직임과 맞물려 정부의 벤처 키우기 정책이 속속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 내놓았던 벤처 활성화 정책 이후 15년 만이다. 또한 정보기술(IT) 벤처 붐의 주역이었던 벤처 1세대들의 엔젤 투자와 지원도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돼 있다. 문제는 이렇게 조성된 벤처캐피털을 어디에 어떻게 적절하게 투입해 벤처 육성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느냐는 것이다.
‘벤처 생태계 발전 방안’이란 주제의 좌담회에 모인 전문가들은 창업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창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현재 IT·모바일에 집중된 스타트업이 의료·문화 산업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돼야 창조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좌담회에 참석한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은 최초의 IPTV인 하나TV의 창업자이자 최근 벤처인들의 자발적인 네트워크 모임인 고벤처포럼을 주도하고 있으며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임지훈 케이큐브벤처스 대표는 초기 기업 전문 벤처캐피털로 왕성한 벤처 투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대표는 정부의 벤처 지원 정책 자금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과 지난 10월 16일 한국경제신문사 15층 회의실에서 벤처 생태계의 현황과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벤처 생태계 발전 방안 좌담회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대표
임지훈 케이큐브벤처스 대표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애플리케이션(앱) 관련 벤처들이 급속도로 생겨나면서 ‘제2의 벤처 붐’이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과거 IT 벤처 붐과 같은 성과는 나오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임지훈 케이큐브벤처스 대표(이하 임지훈) 앱이 뜬다더니 성과가 나왔느냐는 질문이 많이 나옵니다.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성급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일단 모바일 게임 벤처는 수없이 많이 생겨났고 ‘애니팡’ 등은 성과를 증명했어요. 그리고 게임 외에도 ‘카카오’가 상징적으로 3년도 안 됐지만 조 단위의 기업으로 컸어요. ‘배달의민족’, ‘이음’ 등도 이용자가 늘면서 자리 잡았죠. 아직 수익성이나 상장에 대해 조급한 시선으로 보기도 하는데, 네이버·아마존 등 현재 굴지의 기업도 초기에 이렇다 할 수익을 내기까지 수년이 걸렸어요.
모바일 관련 비즈니스는 아직 시작 단계일 뿐,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혁신 서비스가 나올 것입니다. 스마트폰 외에도 주변의 모든 물건들, 예를 들어 칠판·냉장고·운동화들도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모바일 환경에서 더 의미 있는 서비스가 나올 것입니다.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이하 고영하) 한국은 서구에 비해 모바일 시대를 한 걸음 늦게 맞았어요. 2007년 애플에서 아이폰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인 모바일 시대가 시작됐죠. 하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아이폰 국내 시판을 1년 6개월 동안 막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물결에서 소외된 갈라파고스가 됐어요. 그 사이 미국과 유럽 벤처들은 수많은 앱 서비스를 내놓았죠. 우리는 앱 비즈니스를 모방하며 시작했지만 한국 벤처들은 아주 잘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라인이나 카카오톡은 세계가 주목하는 서비스죠. 2000년도 인터넷 시대가 열렸을 때도 싸이월드·새롬다이얼패드·아이러브스쿨 등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냈어요. 페이스북·스카이프 등의 원조가 바로 우리나라였죠. 모바일 시대를 맞아 24시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요. 이는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를 말하고 있죠. 지금 열린 것은 불과 10~2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일례로 칫솔도 인터넷이 연결돼 구강 건강 정보를 전송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대표(이하 정유신) 맞습니다. 우리는 한 번 불이 댕겨지면 확 타오르는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죠. 또한 한국의 IT 등 여러 환경은 테스트마켓으로서도 최고입니다. 잠재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산업과 융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내야 하고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마켓으로 나가야 하는 구조입니다. 내수 시장이 작고 융합 작업을 하는데 업종 간 발전 속도에 괴리가 있다는 제약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봅니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해외와 비교할 때 환경적으로 어떻다고 보십니까.
고영하 우리는 기업가 정신 교육을 한 적이 없어요. 그래도 벤처가 많이 생겨나는 게 놀라울 뿐이죠. 유럽과 미국은 유치원 때부터 창업 게임을 하며 기업가 정신을 가르칩니다. 중학교·고등학교·대학 등 단계별로 창업 프로그램을 갖고 있죠. 즉, 어릴 때부터 창업에 대한 씨앗을 키우고 꿈을 심어줘요.
창조 경제 시대로 가려면 우수한 인재들이 창업에 나서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 미국 최상위 1% 엘리트가 창업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들은 고시와 의대에 매달리죠. 창조 경제는 말로만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무 몇 그루 심는 게 아니라 벤처 생태계 숲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부는 현 교육 시스템을 바꿔 기업가 정신 프로그램을 적극 삽입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창조 경제는 혁신에서 시작되는데 대기업에서는 구조적으로 이를 만들어 내기 힘들어요. 벤처의 상상력으로 이뤄지는 게 혁신이죠. 그리고 벤처의 혁신 모델을 대기업이 인수·합병(M&A)을 통해 흡수하는 식으로 미국에서는 창조 경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유신 기업가 정신이 발현될 수 있도록 교육은 물론 인프라도 필요합니다. 지난해부터 정부 차원에서 기업가 정신 인프라 논의가 많이 되고 있어요. 엔젤 매칭 펀드나 국가 정책 차원에서 세금 혜택을 주는 방법 등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벤처 지원금은 정책 자금 대신 민간 자본이 주축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정부는 자금 투자 대신 세금 감면이란 혜택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많은 젊은이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창업에 나서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설 수 있어요. 정부가 창업 자금을 지원하는 현 시스템에서는 벤처가 실패했을 때 재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창업하겠다고 나서면 뜯어말립니다.
1~2번의 실패 후 비즈니스를 성공하고 수익 구조를 생성해 내는 젊은 인재들이 존경 받는 사회가 돼야 벤처 생태계가 활발해질 수 있어요. 이는 다시 그물망과 같은 벤처 생태계에서 다양한 분야의 벤처의 등장을 유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죠. 또한 어느 정도 성장한 벤처는 대기업과의 M&A를 용인하는 문화도 필요해요. 해외에서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먹튀’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죠.
임지훈 기업의 존재 의미는 기능적으로 접근해 세상의 불편을 해소하고 효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교육을 살펴보면 어릴 때부터 ‘왜 안 되지’라는 문제의식을 품을 수 있게 하고 세상을 바꾸는 대안을 궁리하다가 자연스럽게 창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교육에서는 20년 가까이 기존 세대가 해놓은 것을 세뇌하는 주입식 교육을 받다가 갑자기 문제의식의 훈련도 없이 창업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벤처들이 미국의 성공한 사업 모델을 베껴 국내에 도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벤처 경쟁력과 기업가 정신을 키우려면 수십 년에 걸쳐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정부의 창업 유인책으로 기업가 정신이 발현되는 게 아닙니다.
창업 역량 강화와 함께 창업 지원 자금이 매우 중요합니다. 창업 1세대, 정책 자금 등 벤처캐피털은 이제 상당한 규모로 조성돼 있습니다. 벤처 투자에서 현재 문제점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정유신 벤처기업은 수익 모델이 명확하지 않은 게 많아요. 수익을 쫓아가는 시장 논리로만 접근할 수 없어요. 투자할 때 몇 년 안에 수익이 나는 아이템인지 볼 게 아니라 국가 전체 산업을 성장시킬 미래 잠재성을 보고 벤처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세부적으로 벤처의 연구, 기술을 분석하고 논의해 각 단계별로 필요한 투자가 투입돼야 합니다. 잠재력이 큰 벤처를 발굴하기 위해 정부 기관이 나서는 것보다 엔젤 투자자 등 일종의 에이전시가 중간에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고영하 벤처에는 시드머니(종잣돈)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엔젤 투자뿐만 아니라 정부가 벤처 시드머니를 지원하고 있어 공급에서 부족함이 많이 해소되고 있어요. 스타트업이 엔젤 투자를 받아 걸음마를 떼고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수익을 자체적으로 내기까지 ‘데스 밸리(death valley: 신생 기업이 자금을 유치하지 못해 맞닥뜨리는 첫 번째 도산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해요. 스타트업은 이때 투자금이 절실한데 이를 채워 주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일례로 창업 경진대회에서 1등을 한 스타트업이 엔젤 투자를 받아 사업을 시작했는데, 양산 자금이 필요해 벤처캐피털을 요청하니 아직 매출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이 있었어요.
다행히 최근 이스라엘식 창업 프로그램으로 일컬어지는 ‘글로벌 시장형 창업 연구·개발(R&D) 사업’이 시작됐어요. 전문 엔젤 투자사 5개가 엔젤 투자, 보육, 멘토링을 하고 운영 기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스타트업의 투자 금액을 정부 R&D 지원금으로 매칭하는 방식이죠. 스타트업에 기술개발 중에도 벤처캐피털이 투입될 수 있는 구조로 데스 밸리를 겪지 않도록 할 수 있어요.
정유신 창업 초기에서 벤처캐피털을 받을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기까지 잘 이어지지 못합니다. 재무제표상 유형 자산이 있어야 벤처캐피털 투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중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R&D 지원 자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해 스타트업에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스타트업의 성장 단계별·섹터별로 세분화·구체화해 지원이 결정돼야 하죠. 스타트업의 잠재성을 평가하고 성장 단계를 분석한 툴이 필요합니다. 유망한 스타트업인 데도 불구하고 재무구조상의 제약으로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임지훈 과거에 비해 벤처 투자 환경이 많이 좋아졌어요. 과거 벤처 출신의 엔젤 투자자가 수없이 많아요. 또한 정부의 벤처 지원 정책 자금도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잘 돼 있어요. 기술 기반의 벤처가 더 많이 등장하기 위해 석·박사 등 전문가들을 연구·개발과 창업을 하도록 끌어내야 합니다. 의미 있는 기술이 될지 안 될지 테스트하는 것만으로도 최소 10억 원의 비용이 필요해요. 전문가 그룹 5~10명 정도 모여 기술 창업을 하기까지는 많은 투자금이 요구되죠. 그래서 정부와 벤처캐피털이 매칭해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 기반 벤처는 지원이 쉽지 않겠지만 성과가 나오면 영향력과 시너지 효과가 매우 큽니다.
창업 과정, 그리고 사업 실패와 관련해 수많은 규제와 제한을 토로합니다. 일례로 창업자 연대보증 등은 대못으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좋은 벤처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시급히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고영하 창업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창업에 도전했다가 잘 안 되면 연대 보증제 때문에 신용 불량자가 됩니다. 창업하겠다는 젊은이들에게 쉽게 1억 원 정도의 투자금이 주어집니다. 이들에게 보증을 세워 놓고 뿌리듯이 벤처 투자가 이뤄집니다. 하지만 벤처 중 성공하는 확률은 10%에 불과해요. 나머지 창업자들은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는 것이죠. 그래서 ‘집안을 말아먹는다’며 창업을 말리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죠. 창업자 신용 연대보증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 대신 벤처 지원금을 줄 때보다 엄격하게 심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독일·핀란드·스위스·이스라엘 등 창업이 활성화된 국가에서는 정부 심사가 매우 까다롭고 쉽지 않아요. 벤처 지원금은 정부 지출인 만큼 스타트업에 대해 심층 분석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선별적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또한 현재 벤처 지원금의 보증제도 때문에 벤처의 대표 교체가 불가능해요. 벤처가 성장했을 때 M&A가 있을 수 있는데 보증이 있다면 원천적으로 이뤄지기 힘든 상황인 것이죠.
임지훈 시장 논리상 경쟁력 없는 벤처는 사라져야 생태계가 건강합니다. 창업 경진대회도 수없이 많고 상금도 적지 않아요. 창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이 프레젠테이션만 잘해도 지원 대상에 선정될 수 있는 허점이 있는 게 사실이죠. 우후죽순처럼 벤처가 많이 생겨나도록 지원할 게 아니라 정말 의미 있는 시도를 하는 스타트업에 정말 필요할 때 자금이 지원되도록 현재 정부의 벤처 지원 시스템을 정비했으면 합니다.
IT 산업, 모바일 분야의 벤처 붐에 이어 차세대 벤처들이 생겨날 수 있는 기반 기술이나 혁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고영하 바이오 기술이라고 봅니다. 국내 의료진은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두 모여 있고 의료 수준도 매우 높아요. 새 정부가 창조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가장 우수한 인재가 몰려 있는 의사 집단을 창업 시장으로 어떻게 끌어내야 할지가 숙제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적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고 있어요. 바이오 기술, 메디컬 디바이스와 관련한 벤처는 많은 성장 동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정유신 벤처 업계에서 주목하는 분야를 일컬어 ‘바카라’라고 합니다. 바이오·카카오톡·딴따라죠. 문화 산업 역시 잠재성이 높습니다. 우리나라는 인적자원밖에 없는 상황에서 문화 산업에 최근 우수 인재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문화 산업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 세계적으로 ‘한류’ 붐도 있기 때문이죠. 문화 산업은 그 자체의 수익을 넘어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 등 무형의 이익도 상당히 큽니다. 문화 산업 벤처 지원에는 당장의 수익을 넘어 이런 가치를 보고 투자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취재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 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