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없어도 늘 당당하셨던 아버지

김대균 토익 강사

아버지는 행복한 낭만주의자였다. 공부와 관련해서는 자식들에게 매를 한 대도 때린 적이 없고 사냥과 낚시를 즐기셨던 분이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 때까지 유복하게 살아 필자도 아버지를 따라 꿩 사냥을 많이 다녔다. 아버지는 명사수였고 용인·여주·이천 지역을 돌아다니며 아버지가 명중시키면 퍼덕거리는 꿩을 필자가 주워오곤 했다. 한 번에 20~30마리의 꿩을 잡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집에서도 먹었는데 야생 꿩을 귀한 줄 모르고 먹으면서 컸다.



사람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가까운 친척에게 사기를 당하셨다. 강남 땅이 평당 1만~2만 원 할 당시 은행 현금 7000만 원이니 큰돈이었다. 그 이후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어 집의 규모를 줄이고 나중에는 방 두 개에 여섯 식구가 월세를 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버지는 술이 느셨고 이전의 화려한 생활에 비해 억울하게 당한 처지를 슬퍼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존심을 지키셨고 스스로 품위를 당당하게 보이셨다. 지금도 그런 당당함이 기분 좋게 생각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여유 있으면 여유 있는 대로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사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다시 생활이 안정되면서 아버지는 전국을 차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 국내 일주, 세계 여행을 즐겼고 어머니와 늘 함께 즐겁게 생활하셨다. 힘들게 강의한다면서 직접 강화도에 내려가 인삼을 사서 내게 달여 주셨고 한강에서 나는 굵은 뱀장어를 잡아 오시기도 했다. 어릴 적에도 잉어를 잡아 많이 달여 주신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잡아 오시고 어머니가 달여 주신 잉어 덕분에 아직 내가 건강한 듯싶다.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췌장암 진단을 받고 6개월을 사셨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병원을 직접 찾아와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내게 이런 유언을 해주셨다. “돈 욕심 부리지 말고 즐겁게 살아라!” 아버지는 땅을 잘 아시는 분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라는 땅을 샀고 그것이 모두 올라 훌륭한 유산이 됐다.

아버지는 옛날 어르신들처럼 집안의 중심을 잡아 주셨고 요리도 잘하셨다. 할아버지가 요리를 잘하셨는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요리를 시작하셨다.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제철 요리를 준비해 주셨다. 봄에는 주꾸미, 가을에는 전어를 맛있게 요리해 주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너무 돈이 없어 수업료를 제일 꼴찌로 내고 참고서를 사지 못해 어려웠던 시절에는 아버지가 무척 원망스러웠고 미웠다. 그때도 아버지는 당당하셨고 내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습이 멋지게 생각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여유 있으면 여유 있는 대로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사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미래를 너무 걱정하지 않고 그날그날을 즐겁게 사시면서 평범한 데서 재미와 감사를 느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는 내게 처음 넥타이를 매는 법을 알려 주셨고 운전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삶을 감사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가 산소에 가면 산소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신다. “보고 싶어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즐겁게 살다 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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