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나의 ‘도전 정신’ 답사기

하형석 미미박스 대표

아버지는 무서운 게 없는 분이다. 어렸을 때 골목대장을 하셨고 지금도 그 모습으로 살아가신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내게도 가르치려고 노력하셨다. 유치원 때는 태권도를 배우게 하셨고 초등학교 때는 새벽 5시에 쿵후 선생님을 집으로 불러 일대일 과외를 시키셨고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특공무술을 시키셨다. 크지 않은 체격인데 혹시나 외모 때문에 용기를 잃을까봐 극복의 수단으로 운동이라는 도전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군대에 갈 때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종 전역하신 카투사 헌병대 이야기를 하셨다. 군대가 얼마나 힘들었고 재밌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고 미국 문화를 처음 배운 곳이라고 하셨다. 결국 나도 친구와 함께 SSU라는 심해잠수부대를 지원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지원한 그곳은 시험 통과조차 어려운 힘든 부대였다. 아주 추운 겨울날 수영장에서 시험을 보고 바다 수영, 심해 잠수 50m 등 다양한 시험이 있었고 정말 운이 좋게 합격했다. 하지만 시험 중간에 코를 다치는 바람에 수술을 받고 입대 불가 판정을 받았다. 억울한 마음에 나는 육군에서 아프간 파병을 다녀왔다.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아버지가 허락해 주셨다.

전역 후 한국에서 다니던 공대를 그만두고 미국 뉴욕의 패션 스쿨에 편입했다. 뉴욕이라는 도전이었다. 패션 스쿨 이후 감히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는 톰 포드(Tom Ford) 밑에서 일했다. 그 경력으로 한국에 돌아와 정말 많은 곳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때 한 독일 벤처 인큐베이터 회사에서 6000만 원 가까운 연봉과 헤드 바이어라는 자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출근 첫날 저녁 아버지가 출근은 어땠냐고 물어보실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무지한 것이었지만 그때는 엄청난 기대에 비해 마음에 쏙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나는 내성적으로 태어난 아이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세상을 상대로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남자로 키워 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 회사가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네가 얼마만큼 키울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시더니 엄청난 액수를 요구하라고 하셨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 3개월 근무에 3억 원을 요구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제안이지만 매출 30억 원을 그 기간 내에 달성하지 못하면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의 제안은 회사에서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렇게 그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회사가 아직 큰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구나”라고만 이야기하셨다.

그 이후 티켓몬스터에서 일했고 현재는 미미박스라는 회사를 운영 중이다. 창업 때 아버지는 “잃을 게 없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내성적으로 태어난 아이다. 태권도장에서 여자 아이들에게 맞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그런 나를 세상을 상대로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남자로 키워 주셨다. 이제는 나도 도전이 아닌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도전은 사람을 항상 설레게 한다. ‘와이 낫(Why not)?’이 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질문의 대답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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