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브랜드숍에‘쓴맛’…OEM으로 살길 찾아

한불화장품이 본업까지 바꾼 까닭

국내 화장품 업계에는 ‘토종 화장품’으로 불리는 업체들이 있다. 한불화장품·한국화장품·코리아나화장품 등이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업계 5위권 안에 들던 화장품 강자들이었다. 하지만 2003년 미샤를 비롯한 원 브랜드숍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서서히 무대 뒤편으로 밀려났다. 몇몇은 완전히 무대 밖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지난해 부도가 난 나드리화장품이 대표적이다. 쥬리아·에바스·피어리스 등 추억의 브랜드들도 있다.



생존을 위한 중견사의 변신은 소리 없이 진행돼 왔다. 최근 눈에 띄는 부분은 전통의 한불화장품이 주력 사업을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으로 바꾼 것이다. 한불화장품은 한때 국민 화장품으로 불리던 1세대 브랜드다. 1980~1990년대 종합 화장품 전문점 전성시대에 센세이션·에스까다 등 대표 브랜드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 됐다. 한불화장품은 지난해 두 개 법인으로 분리를 시도했다. 한불화장품과 한불보떼가 그것이다. 한불화장품은 OEM 사업을 담당한다. 한불보떼는 기존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잇츠스킨이라는 중저가 브랜드를 별도 법인으로 두고 있다.


미샤·더페이스샵 등에 밀려
원 브랜드숍이 화장품 시장을 주름잡으며 생긴 변화는 생산과 유통의 분리다. 원 브랜드숍은 생산 시설 없이 마케팅과 유통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규모를 불려 왔다. 생산을 담당하는 쪽은 후방인 OEM과 제조업자 개발 생산(ODM) 업체들이다. 한국콜마와 코스맥스가 대표적이다. 2013년 원 브랜드숍 시장은 5년 사이 4배 커진 약 1조9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브랜드숍 업체들은 시장의 트렌드에 부합하기 위해 혁신적인 제품을 시장에 빠르게 공급해야 한다. 이 때문에 브랜드숍이 커질수록 생산 업체인 OEM·ODM 산업 규모도 함께 커 왔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관계처럼 브랜드숍의 성장과 OEM·ODM 시장 성장은 상호 비례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불화장품은 당초 유통과 생산 기능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자체 생산 시설을 가지고 자사의 브랜드 물량을 소화해 왔지만 유통 쪽 수요가 줄어들자 생산 시설에까지 타격을 미쳤다. 그렇다고 공장 가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유통과 생산을 분리해 각자 독자 생존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유통과 별개로 생산 기능을 살리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는 차원에서 OEM 사업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자사 브랜드 대신 다른 업체의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옛 화장품 강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갈 곳을 잃은 옛 강자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사이에도 자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 잇츠스킨 브랜드로 중저가 시장에 진출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불화장품의 브랜드 파워가 약해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2003년 매출액 2000여억 원으로 업계 4위를 유지했지만 원 브랜드숍 진출로 주력 유통이 로드숍으로 바뀌었고 전국의 대리점들이 하나둘 간판을 내리면서 2004년부터 한불화장품 매출액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었고 그래도 회복되지 않자 2006년 중저가 시장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미 미샤·페이스샵·스킨푸드 등 유명 브랜드숍들이 자리를 잡은 상태로, 뒤늦은 진출이었다.



비슷한 중견사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코리아나는 한때 매출액이 3000억 원을 넘어서며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과 함께 빅 3로 불렸으나 2004년과 2006년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한때 ‘이브로쉐’라는 중저가 브랜드를 출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 했다. 코리아나는 뒤늦게라도 화장품 전문점 시대가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브랜드숍을 따라가는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에스테틱 브랜드를 키우겠다며 세레니끄라는 브랜드를 시작했지만 이 또한 매출을 되돌려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코리아나는 2009년부터 4년째 영업 손실을 기록해 현재 오너 일가가 지분 매각을 추진하는 한편 큐캐피탈파트너스를 통한 투자 유치를 검토 중이다.

한국화장품도 2010년 더 샘이라는 원 브랜드숍을 만들었지만 사업 초기 고가 전략으로 성공의 빛을 보지 못했다. 원 브랜드숍의 특징은 중저가 시장인데 비해 차별화 전략으로 고가 전략을 채택했지만 소비자들이 외면했다. 무엇보다 중저가 시장이 포화된 2010년 뒤늦게 진출해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실적을 내고 있다. 한국화장품은 더 샘 론칭 첫해에 영업적자를 40억 원 기록했고 지난해 더샘 매장이 늘어났는데도 적자 폭이 4배 이상 늘었다. 한국화장품은 지난해 매출 703억 원에 영업적자 162억 원을 기록했다.

결론적으로 모두 뒤늦은 브랜드숍 전환으로 재기를 노리는 데 실패했고,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성장 동력으로 떠오른 시장이 바로 OEM·ODM이다. 한불화장품은 OEM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등 영업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화장품과 코리아나 또한 모두 이 시장에 진출한 상태다.


“ 한불화장품은 지난해 두 개 법인으로 분리를 시도했다. 한불화장품과 한불보떼가 그것이다. 한불화장품은 OEM 사업을 담당한다. 한불보떼는 기존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 ”


OEM·ODM 성장 여력 커
한불화장품이 OEM을 눈여겨본 배경은 무엇보다 시장 성장률에 있다. 리딩투자증권에 따르면 2012년 OEM·ODM 생산 시장은 전년 대비 45.8% 증가했다. 브랜드숍 규모가 6% 늘어난 것과 비교할 때도 큰 성장률이다. 무엇보다 브랜드숍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로 경쟁 과열이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이화영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업체들은 경쟁 과열로 마케팅 비용을 과다 지출하며 영업이익 증가율이 매출 성장률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매출 성장마저 둔화된다면 영업이익 성장성은 마이너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반면 OEM·ODM 시장은 브랜드숍 경쟁이 과열될수록 높은 기술력을 요하는 제품 수요에 따라 성장 가능성이 점쳐진다. 각 브랜드숍들이 차별성이 있는 제품 포트폴리오로 추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제품 보강이 요구되기 때문에 제품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ODM 업체 의존도가 높아질 전망이다.

최근 들어 브랜드숍과 홈쇼핑, 인터넷 쇼핑몰 확산 등 유통이 분화되면서 OEM· ODM 산업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있다. 국내 OEM은 일본 등의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시장의 성장 여력은 아직 충분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이 시장은 코스맥스와 한국콜마가 약 50~60%의 시장을 차지한 가운데 후발 주자들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코스메카코리아·나우코스·제니코스·하나코스·제닉 등을 비롯해 한불화장품·한국화장품·코리아나 등 기존 화장품 중견사들도 뛰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200여 개의 OEM·ODM 제조업체가 있으며 시장 규모는 8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한불화장품 관계자는 ‘해볼 만한 경쟁’이라고 말했다. 1~2위 업체가 5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나머지 50%가 아직 공략이 가능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50%의 시장을 두고 신규 업체들의 중위권 경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불화장품과 함께 2010년 법인 분리를 통해 올해 본격적인 OEM 사업 확대에 나서는 한국화장품제조, 네슈라화장품의 셀랩, 생그린 등 올해 OEM 사업 전개를 천명했던 브랜드사의 공격적인 행보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불화장품 관계자는 “현재 OEM 법인에서 유통 법인의 두 배 매출을 올리고 있다”며 “오랜 연구·개발 노하우로 미샤의 보라색 병을 만드는 등 조금씩 파이를 키워가고 있다. 성장 동력을 마련해 옛 화장품 강자로서 재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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