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에세이] 소유와 자유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이사

질투라는 추악한 감정도 그런 집착과 소유에서 나올 것이다. 아내에게 멋진 신사를 소개하고 같이 음악회에 다녀오라고 두 장의 표를 주는 바보 같은 남편은 없겠지만 한 번쯤 생각은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은 내 거야.” “그것은 내가 한 거야.” “이 조직은 내가 만든 것이야.” “○○그룹 부사장 걔, 내가 예전에 데리고 있던 부하야.” 이런 생각이 ‘소유’인 것 같다. 내 것에 집착하고 노력과 성과를 고집하면 스스로가 피곤해진다. 내 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움도 생긴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가 한 게 뭐 있나? 그냥 옆에서 보았을 뿐이지”라고 생각하면 피곤하지 않다. 스스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사람들끼리의 소유 중 부부가 대표적인 관계일 것이다. 남자가 나이 들면 아내가 더 필요해진다. 아니, 늙어버린 아내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도 가끔 있다. 50대에는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마누라를 여행 보내. 아니면 친정 가서 며칠 쉬다 오라고 하던가.” “그래 맞아. 소유를 놓아 버리면 그 대신 자유를 얻게 되지”하고 웃었던 때가 많았다. 그런데 60대 후반이 되면서 그런 이야기가 점점 없어지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아내에게 의존할 때가 많아진다. 그것이 그냥 서로 믿고 의존하는 삶이면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집착과 소유가 되면 서로 피곤해진다.

질투라는 추악한 감정도 그런 집착과 소유에서 나올 것이다. 아내에게 멋진 신사를 소개하고 같이 음악회에 다녀오라고 두 장의 표를 주는 바보 같은 남편은 없겠지만 한 번쯤 생각은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설마 40년을 같이 산 아내가 나와 아이들, 손자를 버리고 그 신사와 줄행랑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음악회 표 두 장을 진짜로 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아내는 뭐라고 할까. ‘이 사람이 농담하나? 미쳤나? 아, 이 사람이 자기 바람피우는 게 미안해 그러는구나’하고 오히려 나를 의심하고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괜히 40년 동안의 우정이 거꾸로 불신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집의 창문은 닫으라고 있는 것일까. 열라고 있는 것일까. 물론 두 가지 용도가 다 있다. 그래도 무엇이 우선일까. 사람들에 따라 다를 것이다. 창문은 기본적으로 열라고 있는 것이다. 집이 시멘트 담으로만 쌓여 있고 창문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창문이 있으면 무조건 여는 사람, 자동차의 창문도 여름이나 겨울이나 조금이라도 열고 다니는 사람들은 아마 창문은 열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반대로 창문은 닫으라고 있는 것이다. 밖의 먼지를 막고 소음을 차단하고 모르는 사람이 집 안을 살피는 것을 못하게 하고 에어컨을 켜 놓은 방안의 찬 공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창문이다. 창과 문은 나를 보호해 주는 장치다. 하긴 요즈음 만든 고급 고층 아파트에는 아예 창문이 없다고도 한다. 창문은 특별한 때가 아니면 닫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친구는 소유의 관계가 아니다. 친구끼리는 배타적이지 않다. 독점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친구가 편한 관계인 것 같다. 서로 믿고 위하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서로 화도 내고 꼭 필요할 때에는 조언도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는다. 친구의 성공과 행운에 샘이 나는 때는 있지만 질투하지는 않는다. 친구를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내 곁에 두고자 하지는 않는다. 친구라는 사이는 자유로운 관계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런 친구 관계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마누라와 자식까지 합해서 말이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