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격 없이 묻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첫걸음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숨은 뜻

새로운 전자 기기를 대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왜 그리도 사용할 내용들이 많은지(‘사용할 수 있을’ 내용이지만 ‘끝내 사용하지 않는’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사용 설명서도 두툼한 소책자에 가깝다. 아버지는 깨알 같은 글씨 탓을 하며 아들 녀석을 호출한다. 사실 돋보기를 쓰기 싫어서가 아니라 매뉴얼 북을 봐도 도통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매뉴얼 북은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서술된 것들이 많아 정작 소비자가 그런 시각과 기술적 이해가 없으면 아무리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중에 직접 전화로 문의하거나 방문한 엔지니어가 그걸 실연해 보이면 어찌나 단순하고 쉬운지 맥이 풀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매뉴얼 북은 나이 든 일반 소비자에겐 은근히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럴 때 만만한 게 자식들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굳이 설명서를 보지 않고도 뚝딱 금세 해결한다. 아마도 DNA가 다른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런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래도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정작 묻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묻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늘 가르쳐오기만 한 녀석들에게 의존한다는 데 마음이 상해 물어볼까 말까 주저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새로운 소통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비보다 자기가 나은 점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은근히 제 딴에도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불치하문(不恥下問)이 아니겠는가.

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자님께서 하셨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논어’의 ‘공야장편(公冶長篇)’에 나오는 대목이다. 자공(子貢)이 위(衛)나라의 대부인 공문자(孔文子)의 시호(諡號)가 어떻게 해서 ‘문(文)’이 되었는지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첩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로써 시호를 문이라 한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文也).” 불치하문의 출처 배경이다.

시호를 받았다는 건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장점과 인격을 이야기하면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콕 집어 말했다는 건 그게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실 불치하문의 전제 조건이 있다. 그건 배우기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데 관심이 없으면 물을 일도 없으니까.


공자가 꼽은 훌륭한 인격의 조건
배운다는 건 기존의 지식에 갇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앎과 삶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진취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다. 자신의 프레임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다른 프레임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프레임을 넓히는 것이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남에게 우습게 보일까봐 묻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묻는 건 자칫 권위를 손상당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여유가 필요하다. 어렵게만 여겨지던 상사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묻는 것만으로도 뿌듯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 경우에 상사의 무지를 폄훼하고 깎아내며 우습게볼까. 오히려 그렇게 물어봐 준 게 고마울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자부심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부하 직원을 키워주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기꺼이 묻는 게 어쩌면 고도의 리더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대기업의 회장도 자기 회사 건물에 대해 청소부 아주머니보다 모르는 게 많을 수도 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청소에서 그렇다는 것만은 아니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배울 게 많을 수 있다. 그런 예를 공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공자가 실에 구슬을 꿰면서 곤욕을 치렀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이라 손방이어서 그랬겠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공자의 태도다. 마침 바느질하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대학자 공자가 보잘것없는 여인에게 물으면서 부끄러워했을까.






“ 경제문제에서만 기브 앤드 테이크가 성립하는 건 아니다. 대화도 소통도 결국 기브 앤드 테이크다.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여인은 개미허리에 실을 매고 구슬 구멍 반대편에 꿀을 발라 개미가 그 냄새를 맡으며 자연스럽게 구슬을 통과해 구슬을 꿸 수 있다고 가르쳐 줬다. 그래서 만들어진 사자성어가 바로 ‘공자천주(孔子穿珠)’라는 말이다. 공자는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볼 수 있는 게 바로 공자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읽어내야 한다.

윗사람이 말을 걸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입을 열지 않는다. 나는 열렸는데 왜 너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느냐고 채근할 일이 아니다. 소통의 부재는 전적으로 윗사람 탓이다. 그냥 기다리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묻는 것은 사실 말을 거는 행위이기도 하다. 물음에는 답이 따른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고 저절로 소통이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묻고 대답하며 가르쳐 주는 관계가 형성되면 아랫사람도 어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와 묻는다.


권위는 강요에서 나오지 않는다
경제문제에서만 기브 앤드 테이크가 성립하는 건 아니다. 대화도 소통도 결국 기브 앤드 테이크다.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다. 공자가 자공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교훈이었다. 사람들은 위나라 대부 공문자가 아랫사람에게 물었다고 우습게 여겼을까. 그를 멀리했을까. 나를 낮추면 상대의 물이 자연스럽게 내 그릇으로 들어온다. 나를 높이면 펌프로 퍼 올려도 물이 닿지 않는다. 겸손과 배려가 바로 소통의 바탕이고 새로운 지식으로 성장하는 발판이다. 그러니 기꺼이 물어야 한다.

처음에는 부하 직원이나 자식에게, 혹은 학생에게 묻는 게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그건 상사나 아비로서,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잃는 게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부하 직원이나 자식, 제자에게는 그 일을 통해 더 살가워지고 서로 친근해지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물꼬가 될 수 있다.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된 건 소통을 거부하고(‘소통’하자고 다가서면 ‘소탕’하고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호소’하면 사회 불안 세력이라고 ‘호도’한다. 그들에게 ‘소통’은 ‘소와 통하는’ 것일 뿐이다)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고집스럽게 자신의 견해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지도자와 권력 집단이 낳은 기형적 산물이다. 걸핏하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가봐서 아는데’ 운운하며 공은 자신의 몫으로 돌리고 허물은 남 탓으로 돌리는 유치함(도대체 지도자가 아랫사람과 공 다툼을 하는 그 유치찬란한 모습을 보면 우리 자신이 불쌍해진다)이 만연하면서 소통이 철저하게 막혔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권위와 가식, 억압과 통제의 사슬을 벗어야 한다. 세상사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이는 결코 소통할 수 없다.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건 자신의 위신을 깎는 게 아니라 자신의 관용과 적극적인 이해의 태도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권위는 강요하는 게 아니라 존경에서 온다. 윗사람이 어렵게만 느껴져서는 존경의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만 쌓인다. 심지어 그걸 강요하는 윗사람을 속으로는 경멸한다. 소통은 내 마음을 열고 기꺼이 아래로 내려갈 자세가 마련됐을 때 가능하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