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청포도 그늘 같은 청량한 사랑

2006년 6월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묘소 앞에 다시 섰다.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한 바로 직후였다. 나는 회사가 상장한 기쁨을 그 누구보다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어 천안에 있는 선산을 찾았다. 나는 살아생전에 성공하는, 아니 뭔가 이룩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천안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지금은 고속전철 역사가 들어와 있지만 예전에는 시내에서 4km나 떨어진 외진 마을이었다. 60가구 중 안 씨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할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의학원에 다니시고 한의원을 잠깐 개원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접으시고 천안향교 전교와 마을 이장을 맡아 보셨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평생을 보내셨다.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마을을 발전시키셨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셨다. 또한 마을에 새로 길을 닦고 전기가 들어오게 하고 버스도 다니게 하시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늘 공경을 받으셨다. 나도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존경하는 인물이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대도시에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나는 방학 때마다 시골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쉴 때면 늘 전축을 크게 틀어 놓고 음악을 즐겨 들으셨다. 집에 수백 장의 LP가 있을 만큼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셨다. 우리 집은 늘 손님으로 북적였다. 바둑을 두러 오시는 분, 농사일과 사업을 상의하러 오시는 분, 또 집안 대소사나 법적인 소송 문제를 상의하러 오시는 분 등 많은 분들이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친절하고 정중하게 그분들을 맞이했고 좋은 조언과 덕담을 늘 해주셨다.

중학교 겨울방학 때였다. 영문법을 잘 몰라 애를 태우는 모습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1주일 만에 내게 60페이지에 달하는 중학생용 영문법 노트를 직접 만들어 주셨다. 나는 그때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과 그 정성에 놀라 그때부터 아버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는 평생 아버지에게 매 한 대 맞지 않고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아이가 매 맞을 일을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절대 매를 들지 않으셨고 내게 화 한 번 내지 않으셨다. 항상 말로 타이르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런 사랑은 내게 큰 힘이 됐다. 사업을 하면서 한결같이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밝은 미소로 사람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내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이셨다.

지금도 여름이 오면 대청마루에 앉아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청포도를 보면서 ‘청포도 사랑’을 즐겨 듣던 아버지가 사뭇 그리워진다. 포도나무를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그 잔잔하고도 청량한 자식 사랑을 오늘도 느끼며 아버지를 대신해 하루하루 열심히 또 살아가고자 한다.



안병익 씨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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