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스타들의 리더십] 최태지 예술감독, 학연·지연 배제…‘공정의 리더십’ 발휘

어떻게 최고가 되었나②-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재일 교포 2세로 대학 졸업 때까지 일본에서 자란 최태지(54) 국립발레단 예술감독(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화된 이후부터 단장의 정식 명칭은 예술감독임)은 1996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국립발레단 단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 발레의 대중화에 앞장서 온 인물로 손꼽힌다. 발레는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에 ‘해설이 있는 발레’로 눈높이를 맞췄고 스타 무용수 육성, 티켓 가격 인하 등을 통해 ‘귀족 발레’를 ‘서민의 춤’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녀의 노력 덕에 국립발레단의 고정 레퍼토리인 ‘지젤’, ‘백조의 호수’는 공연 때마다 매진이고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막을 내린 ‘호두까기 인형’도 102.4%라는 유료 점유율을 기록했다. 공짜 초대권을 안겨줘야 겨우 발레를 보던 발레 불모지에서 관객들이 몰려드는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공정의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다. 최 예술감독은 발레단을 운영할 때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 없는 탁월한 균형 감각을 선보였다. 칼 같은 결단력을 갖게 된 데에는 “사심 없이 일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소신껏 자신 있게 일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말한다. 교포 출신으로 학연·지연 등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무용수를 발탁할 때도 파벌 논란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고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예술감독 자리를 연임하는 것 또한 무용계 쪽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일본에서는 프랑스 유학을 위해 문화청에 국비 장학생 서류를 제출했지만 한국 국적이란 이유로 탈락해야 했고 한국에서는 재일 교포라는 꼬리표 때문에 차별을 받아야 했기에 그 누구보다 ‘공정’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것이다.



‘재일 교포 2세’ 딛고 37세에 단장

최 예술감독의 뚜렷한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스타 마케팅이다. 그녀는 후배 무용인들을 대거 발굴해 스타로 육성했다. 이전보다 많은 공연 기회를 만들었고 신인들을 과감히 무대에 올리면서 김지영·김주원·김용걸·이원국·김창기 등 스타 무용수를 탄생시켰다. 발레 공연장에 10~20대의 팬클럽들이 오기 시작하는 등 붐이 일어났다.

또한 최 예술감독은 단원들의 처우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급여 체계부터 과감하게 칼을 댔다. 취임 당시 국립발레단 단원들은 공무원의 호봉제와 같은 시스템으로 급여를 받고 있었다. 아무리 주역 무용수라고 할지라도 연차가 낮으면 군무진을 맡은 선배 단원보다 월급이 훨씬 적었던 것이다. 실제로 국립발레단의 간판스타였던 최태지 예술감독 또한 적은 월급 때문에 초코파이로 끼니를 때운 일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무용수들의 실력에 걸맞게 연봉제로 월급 제도를 뜯어고쳤고 자연스럽게 내부 경쟁도 유도하게 됐다. 또한 토슈즈를 사는데 월급의 반 이상을 쓸 수밖에 없는 단원들의 고충을 파악하고 올해에도 1억8000만 원 정도의 토슈즈 예산을 확보했다.

오랜 시간 최 예술감독을 봐 온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는 “단장님은 연습할 땐 엄격하지만, 속으로는 정이 많아 연습실 밖에서는 매우 따뜻하다. 단원들을 항상 자식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뭐든 해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녀 스스로도 두 딸을 둔 엄마이기에 단원들에게 한없이 베풀어 주려고 하지만 혹시라도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까봐 조직 내에서는 자신의 인맥은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가깝다고 특별 대우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전략으로 말이다. 오직 실력만으로 무용수들을 무대 위에 세운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다.

2000년 국립극장의 산하기관이었던 국립발레단은 갑작스럽게 재단법인화의 길을 걷게 됐다. 말 그대로 재원이 0원인 상태에서 제 살길을 스스로 찾아 독립하라는 반 강제적인 지침이었다. ‘피 말리는 생존 투쟁’을 벌이던 최 예술감독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공공기관의 복도에서 공무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심정민 무용 평론가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국립발레단, 나아가 발레의 발전을 위해 몸을 더 낮췄다”고 말했다.

운영 자금이 필요하면 관련 부처의 관계자들을 만나러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행정가로서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 덕에 2008년 25억 원이던 국립발레단의 예산은 올해 97억 원대로 늘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심 평론가는 최 예술감독이 이처럼 예산 확보에 주력하는 것은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춤을 추고 국민들에게 좋은 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하나 때문이라고 했다. 최 예술감독의 열정에 후원자는 13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또한 국립발레단 후원회인 KNB 펠로우(Fellows)의 회원이기도 하다.



동반 성장의 비전 제시해

최 예술감독은 현실감각이 뛰어난 수장이다. 탁월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졌기에 국립발레단을 지금처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평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다. 발레가 어렵다고 하면 쉽게 만들고 길어서 졸린다고 하면 짧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할 정도로 오픈 마인드를 가졌다.

1997년에 국내 최초로 그녀가 선보인 ‘해설이 있는 발레’도 무용 평론가 이종호 씨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됐다. 또한 ‘찾아가는 발레’는 발레의 저변 확대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그녀는 보다 많은 이들이 발레를 접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방침인데 군부대나 해남 땅끝마을, 울릉도 등 문화 향유의 기회가 적은 지역을 주로 방문한다.

과거 백화점 앞 상설 무대에서 공연했을 땐 국립발레단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받았지만 발레를 처음 보고 흠뻑 빠진 학생, 아기를 업고 나와 공연을 보던 주부 등 시민들의 순수한 눈빛을 잊을 수 없기에 탈의실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환경이라고 하더라도 최 예술감독은 이 같은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자리를 가리지 않고 관객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무용수의 경쟁력 또한 높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 예술감독은 장기적인 시각과 안목으로 국립발레단의 미래 설계에 나섰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구축해 든든한 살림 밑천을 마련한 것 또한 장점으로 손꼽힌다. 다채로운 레퍼토리 보유는 발레단 명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2000년에는 콧대 높기로 유명한 볼쇼이 예술감독이었던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5대 작품을 국립발레단 정기 레퍼토리로 끌어왔고 세계적 거장인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등도 레퍼토리로 확립했다. ‘왕자 호동’, ‘포이즈’ 등 수준 높은 창작 발레도 여러 작품을 준비해 뒀다.

최근 최 예술감독은 ‘발레학교 설립’ 추진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나라 무용수들은 대학 졸업이 필수이고 남성 무용수는 군복무까지 마치기 때문에 발레단에 입단하면 이미 20대 중반이어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기간이 너무 짧고 해외 진출도 어렵다는 것.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발레를 배우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성공한 무용수들이 은퇴 후 교사나 안무가로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녀의 목표가 됐다. 단원들은 무용계 발전이라는 큰 그림을 제시하는 최 예술감독의 비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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