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가족신문이 있다. 나와 내 동생이 각각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햇수로 29년째 이어오는 ‘비둘기집’이라는 이름의 신문이다. 첫 10년 동안은 매달 1번, 그 이후로는 2개월에 한 번씩 빠짐없이 만들어 친지·이웃·친구들과 각종 인연으로 이어진 지인들에게 나누는 소식지 겸 신문이다. 나와 동생은 29년째 편집인을 맡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신문에 대해 “어떻게 29년 동안 끊어지지 않고 가족신문을 낼 수 있느냐”는 놀라움에 가까운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이러한 ‘장기 집권’에는 아버지와 관련된 비밀이 숨겨 있다.
4년 전, 지난 25년 동안 만들었던 가족신문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두툼한 서류철 7개에 쌓여 있는 가족신문 원본 가운데 상당수의 종이가 해어지거나 사진을 붙여 놓은 스카치테이프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거나 가끔 꺼낼 필요가 있어 빼고 넣다가 신문의 원본이 분실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에 그동안 발행했던 신문을 모두 꺼내 스캔하고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1985년 5월 25일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25년 치 신문을 정독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92년 2월부터 10회에 걸쳐 ‘비둘기집’에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솝우화’가 연재된 것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필체로.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내가 대학에 두 번이나 낙방하고 삼수 생활을 하고 동생 역시 고3 수험생이던 시기였다. 두 명의 편집자가 대학 입시로 고생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가족신문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솝우화’를 연재하면서 가족신문이 중단될 위기를 모면케 한 것이다. 이런!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의 대학 입학보다 가족신문 발행이 더 중요했던 것일까.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부자(父子) 관계와 함께 이처럼 가족신문을 매개로 한 독자와 편집자의 관계가 30년 가까이 덧입혀졌다. 아버지는 ‘비둘기집’이 발행될 때마다 가장 열렬한 팬이자 가장 신랄한 비평자셨다. 지금도 격월로 다가오는 발행일이 되면 가장 먼저 할당된 기사를 e메일로 보내주시며 기일에 맞춰 발송되기를 재촉하는 분이 아버지이고 발행된 신문의 오탈자를 발견해 어김없이 시정을 요구하며 재발 방지를 당부하는 분도 아버지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이는 가족신문처럼 어느새 내게도 마감일에 맞춰 꾸준하게 글을 쓰는 습관과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이어 가려는 근성이 자리매김한 것 같다. 장구한 시간의 연속성을 자랑하는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길로 들어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지금도 종종 삶의 무게감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지난 29년간 중단 없이 이어지는 가족신문의 생명력을 되새기며 생기를 얻곤 한다. 그 생명력의 근원이 되어 주셨던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