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이 말하는 Fed 100년 역사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3년 12월 23일 미국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민주당)은 공화당 의원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틈을 타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기습 상정해 처리하고 서명했다. 이날이 미국 중앙은행(Fed)의 출범일이고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다.
Fed는 이처럼 출발 때부터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탄생했다. 1912년 JP모건·씨티은행 등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은 당시 우군이었던 공화당과 함께 영국 중앙은행(BOE) 같은 단일 중앙은행 시스템을 만들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듬해 집권한 민주당의 윌슨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윌슨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단일 은행 시스템을 배제하고 12개 연방준비은행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채택했다. 윌슨은 이사회도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에 두도록 했고 대통령이 중앙은행 총재(Fed 의장)와 이사회 멤버를 임명하도록 했다.
지금부터 25년 전인 1987년 6월 2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폴 볼커 Fed 의장 후임에 앨런 그린스펀을 지명했다. 그로부터 2006년까지 Fed를 이끌며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 그린스펀은 Fed 100년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Fed는 출범부터 정치적 이슈를 안고 탄생했고 그 이후에도 정치적 이슈에 휘둘렸다”고 평가했다. 최근 워싱턴 D.C.에 있는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가 개최한 ‘윌슨 대통령의 정책 평가’ 세미나에 참석한 그는 기조연설에서 “중앙은행이 없었을 때 미국 경제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뼈 있는 농담’ 한마디에 Fed 역사의 굴곡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때로는 부작용을 불러와 경기 진폭을 확대했다는 점을 Fed의 산증인인 그린스펀이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2000년대 초반 초저금리 정책으로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초래해 2008년 금융 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지적도 받고 있다.
통화정책의 부작용 스스로 인정
그린스펀은 18년간 Fed를 이끌면서 상당한 정치적 압박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Fed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정책 결정을 앞두고 의원들의 관심과 우려 그리고 FOMC 멤버들에게 개별적인 압박이 쏟아질 때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원 재무위원장이 FOMC 회의 도중에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외부 압력으로 정책 결정이 뒤집어진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사실 중앙은행은 세계 그 어느 나라든 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담대한 경기 부양책을 골자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선언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일본은행 총재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 측은 “당선되면 (돈을 무한정 찍어내는) 벤 버냉키 Fed 의장을 당장 갈아치우겠다”며 Fed의 경기 부양책을 공격했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FOMC는 연방정부의 어떤 부처 및 기구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거나 정책 결정이 뒤집어질 수 없도록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며 “FOMC의 결정은 투명하게 진행되고 회의 때 모든 발언이 5년 뒤 낱낱이 공개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린스펀은 또 Fed의 100년 역사는 보수와 진보 간의 잔인한 대결 과정이었다고 했다. 물가 안정과 완전고용이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왔다는 것이다.
워싱턴=장진모 한국경제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