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 싸이의 ‘강남스타일’ 가사 중 한 대목이다. 잘 놀기만 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고 일만 잘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도요타 86’은 전교 1등(=세계 1등) ‘범생이’인 도요타자동차가 ‘나도 잘 놀 수 있다’는 것을 작정하고 보여주기 위해 만든 차다.
물건 만들기(일명 모노즈쿠리)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자동차 장인들이다 보니 대충 세단을 개조해 모양만 스포츠카 흉내를 내는 것에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들이 작심한 도요타 86의 제1콘셉트는 ‘철저한 초저중심’이다.
이를 위해 과감히 스바루의 수평대향 엔진을 도입했다. V자형 엔진에서 마주보는 실린더의 각을 뱅크각이라고 하는데, 대개 세단형 엔진은 90도보다 각이 작다. 각이 작을수록 공간을 적게 차지하지만 무게중심은 위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아예 뱅크각을 180도로 만들어 버리면 무게중심이 낮아지게 된다. 피스톤이 수평으로 왕복하다 보니 권투선수가 ‘원투 펀치’를 날리는 것에 빗대 ‘박서(boxer) 엔진’이라고도 한다.
‘관성모멘트는 슈퍼 스포츠카 수준’
현재 박서 엔진은 스바루 등 소수의 자동차 회사들만 생산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 기술진이라면 콧대가 셀 법도 한데 한 수 아래로 치는 경쟁사의 제품을, 그것도 자동차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엔진을 가져다 쓴 것은 그만큼 초저중심에 대한 의욕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보닛 아래 엔진 커버에는 ‘도요타’와 ‘스바루’의 로고가 동시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직분사 시스템, 가변 흡배기 밸브 등 엔진블록 윗부분은 도요타자동차의 고유 기술이 접목돼 있다.
박서 엔진을 통해 도요타 86은 상하 무게중심이 지상 46cm일 정도로 초저중심을 실현했다. 앞뒤 무게 배분도 2리터급에서 최적의 비율인 53 대 47이다. 도요타자동차 측은 “차량 중심고와 관성모멘트는 슈퍼 스포츠카 영역에 도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초저중심 설계는 일반인 운전자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효과가 확실하다. 어떤 굴곡진 길에서건 차체가 좌우로 기우뚱하지 않고 항상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차가 관성의 법칙을 넘어서 있으니 사람만 버킷시트에 몸을 파묻고 버티기만 하면 될 정도다.
‘86(일본어로 하치로쿠)’이라는 작명도 기발하다. 86은 실린더의 지름(bore)이자 피스톤 왕복운동의 거리(stroke)다. 보어와 스트로크가 일대일로 같은 엔진을 스퀘어(square) 엔진이라고도 한다. 배기구 머플러 지름도 86mm로 만든 것은 하나의 잔재미다.
2리터급 자연 흡기 직분사 엔진은 파워풀하지 않지만 도요타자동차는 의도적으로 고출력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강속구 투수가 아니라 변화구가 뛰어난 기교파 투수가 되어보라는 뜻이다. 후륜구동이면서도 공차 중량이 1240kg에 그쳐 날렵한 몸놀림이 가능하다. 그 덕분에 공인 연비는 비교적 뛰어나 리터당 11.6(자동)~11.8(수동)km에 달한다.
스포츠카답게 실내는 단출하다. 내비게이션은 없고 운전대에는 어떠한 조작 스위치도 달려 있지 않다. 수동변속기 버전은 3890만 원(부가세 포함), 자동변속기 버전은 4690만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