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남겨진 ‘마지막 자산’의 추억

이선영 시인

어느 가을날 대학생인 나와 그 밑으로 줄줄이 4남매를 포함한 온 가족이 아버지가 운전하는 마크 Ⅳ를 타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로 성묘를 갔다. 운전사가 딸린 관용차로 출퇴근하던 아버지는 정년퇴직하기 몇 년 전 운전면허를 따고 노년의 자가운전자가 되어 있었다.

퇴직금은 그간 쌓인 빚을 청산한 뒤 하늘 아래 우리 식구의 거처가 되어 줄 언덕 위의 조그만 연립주택을 마련하느라 다 들어가고, 마크 Ⅳ만이 아버지에게 남겨진 마지막 자산이었다. 그 ‘영예로운’ 마크 Ⅳ를 타고 성묘를 갔다 오던 어느 가을날, 성남 도로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차가 멈춰 버렸다.

졸지에 우리 가족은 날개를 잃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저물녘의 새 모양이 되어 몇 시간 시달리는 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고 아버지는 견인차에 끌려가는 마크 Ⅳ와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갔다.

견인차가 끌고 간 건 시커먼 마크 Ⅳ였지만 내겐 왠지 아버지가 그 견인차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광경으로 보였다. 그 가을날 어둑한 무렵 치른 낭패와 치욕 이후 마크 Ⅳ의 운명은 서서히 기울어져 갔고, 급기야 마크 Ⅳ가 폐차되던 날부터 아버지의 날개도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던 듯하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 2년 만에 내가 첫 시집을 냈을 때, 아버지는 그 시집을 들고 서울의 모 대학교 교수로 있는 아버지 지인을 찾아가셨다. 그 얼마 뒤 그 대학 사회교육원에서 강의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아버지의 당부에 못 이겨 나는 그 대학 관계자를 찾아갔다가 모욕감과 수치심만 잔뜩 안은 채 돌아오고야 말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부터 졸업하면 대학원 들어가서 공부하고 훗날 교수가 되기를 바라셨던 아버지, 하지만 졸업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력서부터 돌리다가 긴 직장 생활에 들어가자 ‘대학원을 가야 하는데…’ 내내 아쉬워하셨던 아버지, 그렇지만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내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아버지, 저 이제 아버지가 원하시던 ‘박사’ 돼서 아버지와 제가 퇴짜 맞았던 그 대학 강단에서 일찌감치 몇 년 전에 강의 마쳤습니다.

며칠 전 꿈속에서 아버지와 나는 서로의 허리에 정겹게 팔을 두른 채 너른 들판을 걸었다. 그런데 꿈속 아버지가 ‘러닝셔츠 바람’이어서, 나는 깨고 나서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게 아버지는 가난과 늙음이 인간을 얼마나 모멸스럽게 할 수 있는지를 뼈아프게 입증한 기호적 존재라는 건 크나큰 비극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던 그 모멸이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과 노력의 결과라는 건 더 참혹한 비극이다. 아버지는 아버지 맨몸에 달랑 걸친 러닝셔츠만 빼고는 자신을 위한 아무것도 가지거나 남겨 놓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아버지의 헐벗음이 싫었고, 그 헐벗음을 휘휘 여울지도록 한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흑백사진 속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얼굴을 들여다보자면, 내가 좋아하는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진다.

독신과 불의의 사고와 고독과 외로움으로 살다 간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지금 여기 없듯이,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종적을 감췄다. 그렇지만 그를 기억하는 나를 통해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여기 살아 있듯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모멸과 치욕과 아픔과 후회와 그리움으로 들썩거리는 나를 통해 아버지는 오늘도 뼈아프게 살아 있다.


공무원 자가운전제 시행에 맞춰
중고 마크 Ⅳ를 몰고 다니던 아버지
아직도 마크 Ⅳ를 몰고 다니는 아버지
어느 날 성묘에서 돌아오다가 대로상에서 고장을 일으켜
가족들을 노상에 세워 둔 노령의 자동차, 트레일러에
두 발 들린 자동차처럼 정비공장에 실려 가던 아버지 하지만
폐차라니?! 아직은 쓸 만해. 꺼진 시동도 다시 걸어 보는 아버지
집에 들어서면 꼭 그 자리 어둠의 한 귀퉁이에 시커멓게
정차해 있는 아버지, 고물 자동차

졸시 ‘자동차와 아버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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