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양적 완화, 유동성 장세로 이어지나 "풀린 돈 돌지 않아…소비·투자 실종"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최근 들어 미국·유럽·일본 등이 위기 극복과 경기 부양, 환율 방어 등의 목적으로 일제히 돈을 푸는 양적 완화 정책을 재추진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위기 발생국이 발행한 국채를 매입해 유로화 가치 안정과 유럽 통합 붕괴에 대한 우려를 줄여나간다는 ‘무제한 국채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도 양적 완화 정책을 추진 중이다. ECB와 별도로 유로랜드 회원국이 아닌 영국도 ECB의 무제한 국채 매입과 규모나 성격이 다르지만 양적 완화 정책을 발표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도 매월 400억 달러 규모로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는 ‘3차 양적 완화(QE3)’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종전의 QE1, QE2와 다른 것은 규모나 시한을 정하지 않고 고용시장이 충분히 개선될 때까지 채권 매입을 지속하기로 해 사실상 무제한 채권 매입에 나선 셈이다.
<YONHAP PHOTO-0248> U.S. Federal Reserve Chairman Ben Bernanke pauses during remarks about a significant shift in the direction of U.S. monetary policy at the Federal Reserve in Washington September 13, 2012. The Federal Reserve launched another aggressive stimulus program on Thursday, saying it will buy $40 billion of mortgage-related debt per month until the outlook for jobs improves substantially as long as inflation remains contained. REUTERS/Jonathan Ernst (UNITED STATES - Tags: POLITICS BUSINESS TPX IMAGES OF THE DAY)/2012-09-14 05:54:27/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일본 중앙은행(BOJ)도 경기 부양 차원에서 엔고를 저지할 목적으로 종전의 자산 매입 규모를 10조 엔 이상 늘리는 ‘일본판 양적 완화 정책’을 발표했다. 인구구조의 고령화 등으로 내수가 쉽게 살아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는 엔고 약세를 지지해 수출을 회복시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계속된 선진국들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유동성 정도는 미국·유로존·영국·일본·캐나다 등 이른바 ‘빅 5’의 통화를 합산한 규모로 파악할 수 있다. ‘빅 5’는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뿐만 아니라 국제통화를 보유하고 있어 이들 국가의 통화 확대가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직간접 파급효과가 절대적이다. ‘빅 5’의 경상 국내총생산(GDP)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5%에 달하고 국제 금융시장에서 ‘빅 5’ 통화의 거래 규모는 80%를 넘고 있다.

‘빅 5’ 중앙은행들의 본원통화(high-powered money) 규모는 지난 7월 말 현재 7조16억 달러에 달해 2007년 말에 비해 2.26배, 금액으로는 3조9200억 달러가 늘어났다. 경상 GDP 대비로는 6% 수준에서 현재는 13% 정도로 커졌다. 금융 위기 과정에서 정책금리가 거의 제로 수준에 도달해 금리 인하 카드가 사라지자 잇따라 대규모 양적 완화에 나선 결과다.

중앙은행에서 푼 돈이 유동성 장세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돈이 잘 돌아야 한다.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과 시중에 돈이 얼마나 많이 풀리느냐는 위기 국면에서는 별개의 개념이다. 하나는 중앙은행이 모든 자금의 원천인 본원통화를 공급하는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자금 가운데 시중에서 퇴장(hoarding)됐던 통화가 방출(dishoarding)되는 것이다.

어느 특정 국가에서 중앙은행에서 풀린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가 통화 유통 속도와 통화승수다. 통화 유통 속도는 일정 기간 동안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반면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보편적으로 총통화, M₂가 활용된다)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로 나눈 수치다.

일반적인 시기에 비해 글로벌 유동성이 빠르게 늘어난 셈이지만, 본원통화 증가에 비하면 총통화 증가 폭은 크지 않다. 본원통화 대비 총통화 규모로 나타내는 통화승수(M₂÷본원통화)는 2008년 초 10배 수준에서 현재는 5.2배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앙은행의 의도대로 시중 유동성이 확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계와 기업의 대출 수요가 부진한 탓이 가장 크다. 디레버리징에 여념이 없는 가계는 빚을 내서까지 소비에 나서거나 자산을 살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업은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위한 대출 수요가 많지 않다.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 금융회사들의 대출 태도가 강화된 것도 원인이다.

양적 완화 등을 통해 중앙은행은 돈을 공급하는데 정작 시중에는 돈이 제대로 돌지 않음에 따라 종전의 이론이나 인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증시를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놓고 ‘역설(paradox)’이나 ‘수수께끼(conundrum)’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빅5’ 본원통화 규모 크게 증가

대표적으로 미국의 신용 등급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트리플 A’ 등급이 떨어지는 속에서도 국채 수익률이 하락하는 ‘미국 국채의 역설(T-bond’s paradox)’이다. 미국은 과도한 국가 채무 부담으로 재정 절벽(fiscal cliff)이 대통령 선거 이후 최대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재정 절벽이 우려되면 국채 수익률이 폭등해야 하지만 반대로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장·단기 금리 격차(수익률 곡선, 기간 스프레드)는 경기를 예측하는데 유용한 지표로 활용해 왔지만 최근 들어 실효성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예다.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70년대 이후 ‘그린스펀 수수께끼’ 현상처럼 장·단기 금리 격차가 마이너스를 보이면 예외 없이 경기 침체가 수반됐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장·단기 금리 격차가 축소되면서 거의 제로 수준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확장 국면이 지속되자 일부에서는 이 지표의 경기 선행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특히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장·단기 금리 격차는 ‘단고장저(短高長低)’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고 있지만 미국 경기는 2009년 2분기 이후 회복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올 9월 이후 발표된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와 벤 버냉키 Fed 의장의 패키지에서는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공급하더라도 정작 시중에 돈이 돌지 않음에 따라 우려되는 부작용을 감안한 흔적이 뚜렷하다. 드라기 총재의 ‘무제한 채권 매입’ 방안은 재정 위기 발생국이 발행한 국채를 ECB의 발권력을 동원해 사주되 풀린 돈은 물가 압력을 줄이기 위해 고스란히 환수하겠다는 불태화(sterilization)와 연계한 ‘재정 적자 화폐화’ 방안이다.

버냉키 의장이 들고나온 ‘무제한 양적 완화’에서 ‘무제한’이라는 것은 1차, 2차 양적 완화 정책과 달리 규모와 기한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다. 드라기 총재의 패키지와 달리 풀린 돈을 회수하지 않겠다고 해 증시에서 반기고 있지만 버냉키 의장 패키지의 행간을 읽어보면 ‘무제한’이란 용어만큼 돈을 풀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결국 선진국들이 양적 완화 등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제대로 돌고 있지 않은 데다 9월 이후 실시된 양적 완화 정책에서는 중앙은행에서 풀리는 유동성 규모조차 줄이기 위한 노력이 뚜렷하다. 최근 증시에서 선진국의 양적 완화로 돈의 힘에 의해 주가가 올라간다는 ‘유동성 장세(liquidity market)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한 때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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