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보이지 않게 물려주신 ‘예술적 재능’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약주를 좋아하신 아버지가 부르시던 ‘어머님 전상서’다. 아버지는 사남 일녀의 셋째로 태어나셨지만 맏이 역할을 하신 효자셨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유년 시절 소학교를 다니셨다. 무슨 독립 운동가의 후손은 아니지만 잘나가는 집안의 도련님으로 공부를 잘해 소학교 상급반 때 저학년을 가르치셨다. 그림에도 뛰어나 만주제국 사생대회에서 2등을 수상,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로부터 학용품을 한 트럭이나 부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일화들은 과거 아버지의 화려한 유년 시절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시대가 그랬듯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유복했던 집안은 고향인 경상도로 낙향한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우체국 서기로 근무하시며 홀어머니와 처, 다섯 자식에 동생들까지 부양해야 했다.

가세가 기울어 힘든 시절에도 아버지의 예술적 기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축을 선물할 정도로 풍류를 아는 분이셨다. 그때 동생과 함께 따라 부르던 패티 페이지의 노래는 아직도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때 반공 포스터를 그려가는 과제를 함께 해 주실 때 크레파스로 우리나라 지도를 정말 똑같이 단숨에 그려 내시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 주시며 “그래 남쪽엔 무엇을 그리면 좋겠니?”라며 물어 보시던 자상한 음성, 또 무용 시간에 다는 번호표를 선생님께서 보시고 “이거 누가 만들었니?” 라며 “이렇게 만들어 오라”고 칭찬해 주시던 일들….

아버지는 우리 오남매를 키워 가시며 엄한 엄마와 달리 화 한 번 안 내시는 다정한 분이셨다. 위로 딸 셋을 두신 탓에 항상 둘째인 내게 “자식아, 네가 아들이었으면 아버지가 좀 든든했을 텐데”라고 하셨지만 친구들과 만나실 때는 계곡이든 다방이든 어디나 데리고 다니시며 어른들 틈에서 나를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해서 아버지는 좀 섭섭해 하셨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외손주들을 예뻐해 주신다.

시집을 가 두 아들의 엄마가 되니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심정이 된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 챙기기에 급급하지만 감사한 것은 팔십을 넘은 연세에도 쩌렁쩌렁한 음성과 힘찬 걸음걸이로 6·25전쟁 참전용사, 종친회, 향우회, 각종 모임에 참여하신다는 것이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지만 내면에 면면히 흐르는 예인의 기질은 속속들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것이다. 따뜻한 감성을 지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해 주신, 보이지 않게 물려주신 예술적 재능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을 느낀다.

올해 첫 시집 ‘언제나 너를 위로해 줄게’를 출간한 것도 다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결과다. 결코 허황되거나 탐욕스럽지 않게 균형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시집에 담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걷고자 했던 삶이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인생의 나침반 같은 것이다.

그림을 그리던 내가 시집을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기뻐하고 대견해 해 주셔서 부족한 내 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고 활기차시길 소원하며 둘째 딸이 올린다.




하금주 시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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