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 국면 브릭스 ‘부활의 조건’ "뉴딜·레이거노믹스 함께 추진해야"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최근 들어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경제가 녹록지 않아 앞날을 보는 시각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올해 성장률은 가장 잘나가던 때에 비해 절반 내외 수준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부터 일부 예측 기관들은 브릭스 경제가 단기적으로 경착륙(hard landing), 중·장기적으로 ‘중진국의 함정(middle-income trap)’에 빠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브릭스의 앞날을 좌우할 ‘중진국의 함정’은 개발도상국이 경제 발전 초기에는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에 성장이 장기간 정체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1인당 소득으로 선진국·중진국·후진국을 분류할 때 중진국은 4000~1만 달러 범위에 속한 국가들을 통칭한다.

역사적으로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던 국가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1960~197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칠레 등과 같은 중남미 국가들은 전형적인 ‘중진국의 함정’에빠져 ‘종속이론’이 탄생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남아 국가들도 필리핀·말레이시아 등을 중심으로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경제 발전 혹은 개방 수준이 한 단계 후퇴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비교적 보편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중진국의 함정’이 나타나는 것은 경험국의 사례를 볼 때 크게 세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무엇보다 한국처럼 짧은 기간 안에 성장 단계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압축 성장(reduce growth)을 주도했던 경제 각료들의 사고가 경직적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From left to right, Brazil's President Dilma Rousseff, Russian President Dmitry Medvedev, Indian Prime Minister Manmohan Singh,Chinese President Hu Jintao and South African President Jacob Zuma wave together during the group picture for the BRICS 2012 Summit in New Delhi, India, Thursday, March 29, 2012. Heads of State of BRICS' nations are meeting in the Indian capital Thursday. (AP Photo/Saurabh Das)

경제 운영 체계도 소득이 일정 수준 도달해 임금 상승 등 ‘고(高)비용, 저(低)효율’ 구조로 바뀔 때 시장경제 도입, 기술 혁신 등에 소홀히 한 것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산업구조 전환도 선진국의 첨단 기술과 인력 도입 등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초기 단계에 성장을 주도했던 주력 산업을 오랫동안 고집했다.

잘나가던 브릭스 경제가 ‘중진국의 함정’ 우려가 나올 정도로 둔화세를 보이는 계기가 된 것은 수출 비중이 높은 미국·유럽 등이 거듭된 위기로 경기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브릭스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럽 경제는 위기가 재정 문제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실물 침체로 전이되는 단계다.

보다 근본적인 대내적인 원인은 성장 경로상 전환기에 나타나는 심한 성장통(growth pains)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브릭스와 같은 후발 경제 국가들은 성장 초기에 ‘불균형 혹은 외연적 단계(imbalance or extensive growth path)’에서 ‘균형 혹은 내연적 단계(balance or intensive growth path)’를 거치는 것이 정형적인 경로다.

‘불균형 혹은 외연적 성장 단계’는 초기 단계에 앨버트 O. 허시만(Albert O. Hirschman)의 전후방 연관효과가 높은 수출산업 위주로 생산요소의 양적 투입을 통해 성장하는 국면을 의미한다. 반면 ‘균형 혹은 내연적 성장 단계’는 일정 궤도에 오르면 시장경제 도입, 기술 혁신 등을 통해 생산요소와 전반적인 경제 시스템의 효율성을 제고해 성장하는 단계다.

브릭스 국가들의 대부분은 ‘불균형 혹은 외연적 성장 단계’에서 ‘균형 혹은 내연적 성장 단계’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2010년 이후부터 심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브릭스 경제의 주력 산업이었던 전통적인 제조업이 성장통에 따라 생산 여건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경쟁력이 당초 예상보다 빨리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릭스 경제의 성장 동인이자 최대 강점이었던 인구가 공업화·도시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어 중국의 ‘루이스 전환점’ 도달 여부가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특정국이 루이스 전환점에 이르면 그때부터 인력 수요와 공급 간의 불일치로 노동자 임금이 급등하면서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정착되는 것이 정형적인 사실이다.



중진국의 함정 벗어나야

브릭스 경제가 당초 예상보다 빨리 둔화되는 것 외에도 정책적으로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도 중진국의 함정에 대한 우려를 높이는 요인이다. 2년 전부터 경기가 둔화될 조짐을 보이자 브릭스 국가들은 금리 인하 등을 통해 유효 수요를 늘리기 위한 뉴딜 정책을 추진해 왔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경제 주체들의 의욕을 북돋워 주는 브릭스판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등 다른 정책 수단이 필요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뉴딜 정책은 1930년대의 혹독한 경기 침체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을 말한다. 1930년대 미국 경기는 유효 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에 따라 물가와 성장률이 동시에 급락하는 디플레이션과 대규모 실업 사태로 대변되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겪었다.

뉴딜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 이 이론의 특징은 ▷상품시장에서 금리에 대해 소비와 투자의 비탄력성(inelasticity) ▷화폐시장에서 투기적 수요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 ▷노동시장에서 근로자의 화폐 환상(money illusion)과 임금의 하방경직성(downward rigidity)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정국의 경기가 이런 상황에 놓일 때에는 정부가 나서 통화정책보다 재정지출을 통해 부족한 유효 수요를 보전해 줘야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고 본 것이 케인스의 구상이다. 이를 실천한 첫 작품이 1930년대 테네시강 유역 개발로 상징되는 뉴딜 정책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경제의 상황은 급변했다. 경기가 침체되는 데도 물가가 오히려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 케인스 이론이 한계를 보이자 새로 등장한 것이 레이거노믹스다. 이 정책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총수요보다 총공급 측면을 강조한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아서 B. 래퍼(Arthur B. Laffer)다. 래퍼는 한 나라의 세율이 적정 수준을 넘어 비정상 혹은 비표준 지대에 놓여 있을 때에는 오히려 세율을 낮춰주는 것이 경제 주체들의 창의력을 높여 경기와 세수가 동시에 회복될 수 있다는 이른바 ‘래퍼 효과(Laffer effect)’를 제시했다.

브릭스 경제는 아직까지 통화 공급을 늘리면 금리가 내려가는 것으로 봐서는 유동성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금리를 내리더라도 종전처럼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고 있는 데다 임금이 빠르게 하방경직적으로 변하는 추세다. 언뜻 보기에는 케인스적인 상황과 유사하기 때문에 브릭스 정부는 경기가 침체되자 금리 인하 등과 같은 뉴딜식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브릭스 경기 침체는 단순히 유효 수요 부족 때문만은 아닌 점을 감안하면 뉴딜 정책과 레이거노믹스의 복합 처방이 필요하다. 요즘 들어 브릭스 정부가 모색하고 있는 경기 부양책의 효과가 종전만 못하고 증시 앞날에 대한 시각이 밝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브릭스 경제가 중진국의 함정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는 종전과 다른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용어 설명●

루이스 전환점은…

루이스 전환점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서 B. 루이스가 제기한 개념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농촌 잉여 노동력이 고갈되면 임금이 급등해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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