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타트업] 영화 추천 서비스에 인생을 걸다

박태훈 프로그램스 대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창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프로그램스의 창업자인 박태훈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영악하다고 할 정도로 그는 창업을 일찌감치 결심하고 딴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을 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왔다.

그런 박 대표도 사람을 모으고 아이템을 선정하고 성과물을 내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가 결국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03학번으로 입학한 박 대표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창업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학교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창업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똑똑하다고 소문난 선배들이 졸업하고 의대에 가거나 고시 준비를 하는 이가 많았다.

‘엔지니어들이 정말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들고 싶은 게 그의 꿈이었지만 사실 롤모델이 없었다. “그 당시엔 구글도 아직 지금처럼 알려지기 전이었고 구글코리아가 설립되지도 않은 시절이어서 막연한 이상만 있지 뚜렷한 타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창업하기엔 부족한 게 많다고 판단돼 여러 가지 방면의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고 우선 다짐했죠.”

역할 모델도, 창업 모델도 찾지 못한 대학생 박태훈이 선택한 것은 창업을 위한 내공을 쌓는 것. 공대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카이스트 내 방송 동아리인 VOK를 한 것도 그런 경험 쌓기의 일환이었다.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넥슨에서 병역 특례로 근무할 때도 그는 동아리 활동을 꾸준히 했다. 대학들의 연합 동아리인 S&D는 경영과 관련된 공부를 하는 동아리였다. “기업을 경영하려면 경영에 대한 공부도 좀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심산이었다.

경영학과 학생도 아니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주도적으로 한 그는 여기서 회장까지 지냈다. 병역 특례 시절 1년 6개월 정도 S&D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사람이다. 경영학을 전공으로 한 강석훈·원지현·김민석 등 훗날 창업을 함께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함께 창업하고 싶어 점찍어 놓았던 인물은 서울과학고·카이스트 1년 후배인 오경윤이다. 2009년 병역 특례를 마치고 복학했지만 창업 열풍이 일던 시대적 분위기와 그의 오랜 열망이 맞아떨어지면서 그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2010년 6월 12일 박태훈은 후배 오경윤을 불러내 강남역 빕스(VIPS)에서 식사하면서 제안했다. “우리 같이 앱 만들자.”



소셜 커머스에서 얻은 두 가지 교훈

오래전부터 박태훈의 창업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던 오경윤이 두말할 것 없이 찬성하면서 둘의 창업 여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국내에 소셜 커머스 열풍을 불러일으킨 티켓몬스터가 서서히 뜨고 있던 시점이었다. “소셜 커머스를 모아서 보여주는 메타 서비스를 만들자.” 그들은 이렇게 시작했다.

회사 이름을 프로그램스의 철자를 변형한 ‘Frograms’로 짓고 개인 사업으로 시작했다. 둘이 만나 결심하고 3개월 만인 2010년 9월 소셜 커머스 메타 사이트인 ‘쿠폰잇수다’를 뚝딱 만들었다. 소셜 커머스에서의 제품 품질 문제나 가격 문제를 지적하는 도발적인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눈길을 끄는데 성공하면서 매체에 많이 보도됐다.

하지만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소셜 커머스 사업은 비용 투입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의 핵심은 영업과 마케팅이었다.

“창업자들이 영업이나 마케팅에 특화되지 못했는데 그런 역량이 가장 필요한 분야에서 창업하니 쉽지 않았죠. 그래서 8개월여 만인 2011년 4월 소셜 커머스 사업을 접었습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지만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우선 사람을 건졌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핵심 창업 멤버인 오경윤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끝까지 함께했다는 것, 그리고 경영 동아리 시절 알게 된 강석훈·원지현·김민석 등 세 사람이 소셜 커머스 사업 초창기 사업에 합류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함께 운명을 개척하는 일에 계속해 동참했다는 것이었다. 사람 말고 건진 게 있다면 뭘까.

“두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선 파트타임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죠. 당시 우리가 고용했던 직원들 중에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한 목적도 있었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더군요. 인생을 걸고 덤벼들어도 될까 말까 한 데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소셜 커머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가 강점이 있는 분야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했습니다. 뜨고 있는 사업이니 이 분야에서 돈을 벌어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생각이었죠. 내가 하고 싶고, 잘하는 분야에 인생을 걸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개인화 서비스가 미래다

이런 교훈을 얻은 이들이 심기일전해 만든 서비스가 영화 추천 서비스인 왓차(www. watcha.net)다. 8월 16일 첫선을 보인 이 서비스는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면 할수록 좋은 영화를 추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서비스다.

이 서비스를 만들게 된 계기는 영화를 좋아하는 창업자들이 검색창에서 영화를 검색하다가 나왔다. “좋은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검색이 정말 많더군요. 그런데 검색 서비스에서는 개개인의 취향·성별·성격 등에 전혀 관계없는 영화 추천이 무작위로 올라옵니다. 개인에 특화된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죠. 접근성이 가장 쉬운 영화를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왓차는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평가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다. 네이버 등 기존 사이트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이트 방문객으로부터 직접 수집한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래도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영화를 10개 이상 평가하면 그때부터 그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자신의 취향이 분석되고 자신에게 적합한 영화를 추천받을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의 취향을 분석해 추천할 영화를 선택하는 알고리즘이 서비스의 핵심이다. 개발력이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현재 회사 직원 13명 중 7명이 엔지니어로 구성돼 있다. 영업과 마케팅에는 자신이 없다고 스스로를 평가절하했지만 개발에는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박태훈 대표다. 이런 점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었나 보다. 올봄 그는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설립한 벤처 투자회사 케이큐브벤처스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개발력으로 승부를 좌우할 수 있는 그런 서비스를 하기로 방향을 전환한 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그는 향후 계획까지 착실하게 세워놓고 있었다. 우선 조만간 영화 추천 서비스의 뒤를 이을 또 다른 추천 서비스가 출시될 예정이다. 이런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은 그가 ‘서비스의 개인화’에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제한돼 있는데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포털이나 개별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아직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우선 사용자들을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계획이다. 그다음 이를 기반으로 개인 취향에 맞춘 광고를 하거나 다운로드 링크 연결 시 수수료를 받는 등 몇 가지 수익 모델이 가능하다는 게 박 대표의 구상이다. 벤처 업계에서 좋은 개발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로 손꼽히는 프로그램스. 박 대표가 꿈꾸는 개인화 서비스의 모델은 이들의 손과 머리에 달려 있다.



임원기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wonkis@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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