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 전쟁 최후 승자는

전통의 가전 왕국은 일본이었다. 소니·파나소닉·샤프 등은 세계시장을 호령했다.

영원한 승자가 없는 것은 가전산업도 마찬가지다. 신(新)패권은 한국이 움켜잡았다. 한국이 새로운 가전 왕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일본은 맥없이 뒷줄로 밀려났다. 한국은 TV·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이른바 ‘4대 가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 열린 유럽 가전 전시회(IFA)의 주인공은 단연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었다. 그러나 추격자를 멀찌감치 따돌리진 못했다. 전열을 정비한 일본 기업들이 옛 영토 회복에

나선 데다 격차가 커 보였던 중국 기업들도 어느새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 유럽은 프리미엄 제품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고 미국은 소송 등으로 잔 펀치를 날리며 한국 기업들을 괴롭히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삼성과 LG가 대약진하고 있는 것은 국내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양궁이 올림픽에서보다 대표 선발전이 더 어렵듯이 가전 시장도 국내에서 이겨야 세계 제패의 자격이 주어진다.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활약상을 짚어봤다.


가전산업은 흔히 ‘사양산업’으로 여겨졌다. 특히 백색 가전은 ‘지는 해’ 취급을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성장률이 워낙 낮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 기관 프리도니아 그룹(Freedonia group)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성장률이 2.6%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하이얼 같은 중국 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고전한 것도 ‘가전 무용론’에 일조했다. LG전자는 한때 백색 가전의 영업이익률이 8%를 웃돌았지만 최근에는 5%대로 추락했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반도체·TV 등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유독 가전에서만은 겨우 적자를 면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비치고 있다. 시장 환경이 점차 개선되는 데다 가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프리도니아 그룹은 “주요 가전제품 수요가 연평균 3.4% 증가해 2015년 3억9000만 대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과 서유럽이 신규 주택 수가 증가하는 데다 교체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마이너스 성장률에서 벗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업계에서도 가전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가전 시장 규모가 2010년 2224억 달러에서 지난해 2511억 달러로 대폭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전망치는 2446억 달러로 지난해보다 감소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체질이 ‘프리미엄’으로 바뀐 것도 가전 시장을 달리 보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 기업들은 더 이상 중저가 제품을 파는 그저 그런 기업들이 아니다. 이익이 많이 남는 최고급 제품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TV는 한국 기업들이 기술 경쟁을 한 발짝 앞서 주도하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 열린 유럽 가전 전시회에서 TV 부문은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우리나라 업체들의 독무대였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참가 업체 중 유일하게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초고화질(UD) TV를 함께 선보이며 차세대 TV 시장을 주도하고 나섰다. 반면 중국은 물론 일본 업체들은 OLED TV를 공개조차 못하며 한국 TV 업체와의 경쟁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였다.



삼성·LG, 세계 가전 시장 주도

냉장고·세탁기 등 백색 가전 부문도 대용량·고효율로 요약되는 시장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세계 최대 용량 냉장고’, ‘세계 최대 용량 세탁기’ 등은 항상 한국 기업들의 몫이었다. 이 과정에서 삼성과 LG의 경쟁은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일례로 지난 6월 삼성전자가 업계 최초로 900리터의 벽을 깬 ‘지펠 T900’을 출시하면서 최대 용량 냉장고 자리를 차지했으나 8월 LG전자가 910리터 제품을 내놓으면서 최대 용량 냉장고 타이틀을 다시 가져왔다.

드럼 세탁기도 삼성이 약 20kg 용량으로 세계 최고 용량 제품에 이름을 올렸으나 6월 LG전자가 21kg 제품을 선보이며 용량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가전 유통 업계 관계자는 “최고 제품은 브랜드 효과를 높여 다른 제품 판매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에어컨은 세계시장에서 일본 다이킨이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LG·삼성이 맹추격하고 있다. 최근 에어컨 시장의 화두인 시스템 에어컨 시장에서 양 사의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스마트 가전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앞서나가고 있다. ‘IFA 2012’에서 삼성전자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노트북뿐만 아니라 집 안의 TV·세탁기·냉장고·에어컨 등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올 셰어(All Share)’ 개념을 보여줬다.

가전 시장의 최신 트렌드는 ‘스마트’와 함께 대용량·고효율이다. 특히 대형화 바람이 거세다. 불황일수록 소비자는 디자인보다 기능에 더 주목하는 경우가 많고 1등 제품만 팔리는 경향이 더 뚜렷해진다. 이 때문에 경쟁 제품보다 뛰어나다는 점이 바로 부각될 수 있는 ‘국내 최대’나 ‘세계 최초’ 등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지난 4월 시장조사 전문 기관인 GfK코리아가 발표한 ‘2011년 소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생활 가전 4대 품목인 에어컨·냉장고(김치냉장고 포함)·세탁기·TV의 대형화 추세가 뚜렷하다. 실제 4대 품목의 지난해 총 판매 금액은 전년 대비 12%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가전 제조업체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품 개발에 자존심을 걸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그 경쟁의 시작은 국내지만 세계시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 수장들은 IFA 2012에서 승리를 공언했다.

“TV는 물론 가전 전 영역에서 2015년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윤부근 삼성전자 사장) “차세대 TV 시장에서 삼성전자 등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서겠다.”(권희원 LG전자 사장)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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