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통화의 저주’에 빠진 일본 "엔화 강세 시달려…한국 압박 ‘ 자충수’
입력 2012-09-04 14:02:26
수정 2012-09-04 14:02:26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독도 문제를 계기로 일본 경제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시달려 왔던 ‘안전 통화의 저주(curse under safe haven)’에 더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 제기돼 주목을 끌고 있다. 배리 아이켄그린 미국 버클리대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안전 통화의 저주’는 미국과 유럽의 잇단 위기에 따라 안전 피난처(safe haven)로 엔화 수요가 증가되는 현상을 말한다.
작년 이후 일본 경제는 유럽 위기가 심화되면서 엔화 강세에 시달려 왔다. 같은 해 8월에 출범했던 노다 정부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취약한 재정과 ‘제로 금리’로 정책 수단이 바닥났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 억제와 경기 부양 차원에서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에 주력해 왔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80년대 평균 4.7%에서 1990년대 이후 1.2%로 급락한 것은 내수 부진 때문이다.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1970년대 이후 0.5~0.8% 포인트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내수 기여도는 1970년대 3.8% 포인트, 1980년대 4.0% 포인트에서 1991~2008년 중 0.6% 포인트로 급락했다.
최근 개선될 조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내수 비중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큰 편이어서 내수 확대 없이는 디플레 국면에서 탈피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내수 부진이 고용과 임금 불안정성 증대, 인구 고령화 진전 등 당장 해결하기 곤란한 구조적 요인들에 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장기 성장 기반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다.
내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면 일본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는 경제 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야 가능하다. 앞으로 엔화가 약세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노다 정부가 시장 개입을 통해 엔화를 약세로 돌려놓아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엔화 강세 요인으로 작용해 왔던 유럽 재정 위기와 미국의 인위적인 달러 약세 정책 등이 언제 마무리될 것인지가 엔화 약세 전환 시기에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정국 통화에 대한 신뢰는 국가의 부채 감내력(debt tolerance)에 대한 시장의 평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부채 감내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는 ▷정부와 민간의 대외 지급 능력 ▷국가 채무의 구조 ▷전반적인 경제·정치·사회의 안정성 등이 가장 큰 변수다. 이 밖에 국내 저축 능력과 외화보유액, 장·단기 해외 자금 조달 능력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일본 국민과 투자자들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국내 투자 편향(home bias)이 강해 대외 충격 발생 시에도 자금 조달에 애로를 겪지 않는다. 일본 국민과 투자자들은 저위험·저수익의 안전 자산을 선호한다. 이 때문에 가계 등의 대규모 여유 자산이 국내 채권 매입 자금으로 활용돼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국내 발행만으로도 대부분의 소요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경제 활력이 장기간 저하돼 왔지만 경제 규모가 크고 경제의 불확실성이 매우 작으며 국가 지배 구조도 건전해 전반적인 부채 감내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성장률·실업률·소비자물가상승률·경상수지(명목 GDP대비 비율) 등 주요 경제지표의 변동성이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실제로 금융시장에서 엔화는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될 때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오래전부터 형성돼 왔다. 엔화의 명목실효환율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반영하는 주가 변동성 지수(VIX)와 포지티브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 유럽 위기 등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엔화 강세 현상이 더 뚜렷해졌다.
엔화 리스크 국제시장서 가장 낮은 수준
일반적으로 시장 리스크, 유동성 리스크, 신용 리스크 등으로 구분되는 리스크 이론에서 특정국 통화가 세 가지 위험이 적으면 안전 통화로 평가된다. 엔화의 시장 리스크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거래가 많은 유로화, 스위스 프랑화, 파운드화, 호주의 달러화와 비교할 때 가장 낮은 수준이다. 최근 10년간 엔화의 표준편차는 호주 달러화보다 훨씬 작고 유로화, 스위스 프랑화 및 파운드화와 비슷하다.
유동성 리스크도 미 달러화, 유로화 다음으로 작다. 엔화의 거래량은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 17개국 공용 화폐인 유로화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다. 시장의 심도를 보여주는 매매 호가 스프레드(bid ask spread)도 유로화보다 크지만 파운드화와 호주 달러화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나타난다.
신용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정부 부채 규모가 작은 미국·독일·영국·호주 등 주요 선진국과 대체로 비슷하다. 일본의 국채 크레디트 디폴트 스와프(CDS) 프리미엄은 단기 국채에 대해서는 미국·호주보다 낮으며 3~5년 만기 국채에 대해서는 주요국을 소폭 웃돈다. 신용 등급은 지난해 대지진에 따른 재정 악화 우려로 하향 조정됐지만 여전히 채무 상환 능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 기업의 경쟁력, 경제 주체의 보수적 투자 행태, 경제 전반의 안전성 등이 단기간 내에 급변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 엔화의 안전 자산으로서의 위상은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일본 경제는 ‘안전 통화의 저주’로부터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예측 기관들도 앞으로 엔·달러 환율이 완만하게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본 경제 회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결국 일본 경제가 ‘안전 통화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느냐 여부는 ‘제2의 역플라자 합의’가 나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역플라자 합의(anti-Plaza agreements)는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 약세인 만큼 제2의 역플라자 합의가 나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국의 태도가 관건이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일본이 독도 문제를 빌미로 통화 스와프 협정 포기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에 대해 경제적으로 압박하면 할수록 유럽 위기로 이미 고통을 겪고 있는 배리 아이켄그린의 ‘안전 통화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시달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영향이 적다고 해서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대응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최선책은 양국 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복원하는 길이다.
●용어 설명●
시장 리스크는…
시장 리스크(market risk)는 시장 상황 변화로 자산의 가치가 변동할 가능성을 의미하며 가격의 표준편차, 준분산(semivariance) 등으로 측정한다.
유동성 리스크는…
유동성 리스크(liquidity risk)는 자산의 유동성이 부족해 결제 의무 이행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으로 거래량, 매매 호가 스프레드(bid-ask spread) 등을 통해 측정한다.
신용 리스크는…
신용 리스크(credit risk)는 채무를 이행하지 못할 가능성으로, 통화의 경우 국가 신용 등급, CDS 프리미엄 등에 반영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