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규제 초읽기, 한국 기업 안전한가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 이들은 다른 계열사들과 순환출자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세계 조선 시장을 호령하는 현대중공업도 마찬가지다.

최근 정치권이 내놓은 순환출자 규제 법안은 바로 이들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확산된 순환출자의 연결 고리를 끊겠다는 것이다. 과연 순환출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절대악일까. 순환 고리가 끊어져도 기업들은 안전한 걸까.

지난해 10월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의 새로운 기업 모델’이라는 제목으로 삼성그룹을 재조명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문어발식 확장, 가족 경영 체제 등 서구와 다른 경영 방식으로 조롱의 대상이 됐던 삼성이 놀라운 성공과 함께 해외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삼성의 독특한 가족 경영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으로 순환출자 구조를 꼽았다.

최근 여의도에선 순환출자와 관련된 법안 2개가 국회에 제출돼 있다. 하지만 이들 법안에 담긴 순환출자에 대한 시선은 이코노미스트와 대조적으로 매우 적대적이다. 두 법안 모두 대기업 사이에 폭넓게 자리 잡은 순환출자 금지를 핵심 골자로 하고 있다.

남경필 새누리당 의원이 8월 6일 대표 발의한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자산 5조 원 이상 63개 상호 출자 제한 기업집단에 대해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는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을 공동 발의한 의원 23명은 모두 새누리당 내 개혁적 성향의 전·현직 의원 모임인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소속이다. 이들은 경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종인 박근혜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경영권과 직결되는 예민한 사안

지난 7월 통합민주당이 당론으로 발의한 법안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통합민주당은 상호 출자 제한 기업집단의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기존 순환출자도 3년 안에 모두 해소하도록 했다. 두 법안은 기존 순환출자의 의결권만 제한하느냐, 아니면 이를 모두 해소하게 하느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의결권 행사가 금지되면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판단이다.

순환출자 규제는 기업의 경영권과 직결되는 예민한 사안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업을 위협하는 적은 경쟁사가 아니라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될 것이라는 작년 초 일본 닛케이신문의 ‘예언’이 현실화했다는 반응이다.

순환출자 금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타깃으로 한다. 삼성전자는 ‘삼성전자→삼성SDI→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연결을 비롯해 4개의 순환출자 고리로 계열사와 엮여 있다. 현대차도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등 3개 순환출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권은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데 생각만큼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며 기업들을 압박할 태세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순환출자가 존재하는 15개 그룹의 순환출자를 모두 해소하는데 9조6000억 원이 들어갈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기업들의 계산은 큰 차이가 난다. 현재 시가를 기준으로 따진 단순 지분 가치 외에 긴급 매각에 따른 가치 하락, 세금 부담, 투자 심리 위축 등 직간접적 비용을 추가하면 최소 30조~40조 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경영 체제를 지탱해 온 핵심 수단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다른 나라에 견줘 경영권 방어 수단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그동안 그나마 순환출자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순환출자 규제 움직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99년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순환출자 억제 방침을 처음 천명했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들의 순환출자를 사실상 묵인했다. 자칫하면 경제의 성장 엔진이 멈춰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 들어 공정거래위원회 주도로 순환출자 규제가 본격 추진됐지만 역시 현실론에 밀려 좌초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순환출자 규제 방안들은 대부분 당시 나왔던 것들이다. 노무현 정부 때 힘없이 사라졌던 순환출자 규제론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말에 더 강력한 태풍으로 되살아난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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