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안전한가] 기업들은 왜 순환출자를 선택했나 "외환위기 후 확산…탐욕 아닌 ‘규제’ 산물"

최근 정치권의 표적이 되고 있는 순환출자는 매우 단순한 개념이다. A, B, C 3개 계열사가 출자 관계에 따라 A→B→ C→A로 연결되는 형태다. 핵심은 A사에서 출발해 몇 단계를 거친 다음 다시 A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순환출자에 참가하는 계열사 수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에버랜드의 5단계 순환출자도 발견된다.

순환출자를 둘러싼 논란이 복잡해 보이는 것은 개념상의 혼란 때문이다. 우선 순환출자가 왜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애초 비판자들은 순환출자가 가공자본을 창출하기 때문에 금지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순환출자 규제 방침을 처음 천명했을 때도 초점은 가공자본 억제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가공자본이 순환출자 고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전선이 바뀌었다. 가공자본은 순환출자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계열사 간 출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지주회사 체제에서도 순환출자와 동일한 가공자본이 만들어진다.



‘부채비율 200%’ 강제로 유상증자 늘어

가공자본은 분식회계 같은 범죄적 사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결합 재무제표를 보면 누구나 가공자본을 뺀 실제 자본 상황을 투명하게 알 수 있다. 가공 의결권은 가공자본에서 파생되는 문제다. 가공자본은 결합 재무제표상에서는 제거되지만 의결권은 그대로 남는다. 여기서 대주주의 소유권과 지배권의 괴리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 역시 순환출자의 고유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환상형 순환출자라는 다소 어색한 용어가 등장한다. ‘순환출자’라는 말 속에 이미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환상형 순환출자’는 불필요한 동어반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순환출자 고유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용어를 더 선호한다. 환상형 순환출자를 살펴보기 위해 지배주주가 10억 원, 소수 주주가 40억 원을 출자해 만든 A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A사가 자본금 50억 원을 출자해 B사를 설립하고 B사가 50억 원을 출자해 C사를, 다시 C사가 50억 원을 A사에 출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랍게도 A사 자본금이 50억 원에서 100억 원으로 늘어나고 지배 주주의 지배권도 20%에서 60%로 높아진다. C가 A에 출자한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궁극적으로 지배 주주가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배 주주가 실제로 지불한 비용은 전혀 없다.

결국 순환출자는 경영권 방어와 직결되는 문제인 셈이다. 비판자들은 순환출자를 지배주주의 ‘탐욕’과 연결하지만 기업들은 정부의 규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주목할 것은 순환출자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재계에 폭넓게 확산됐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 순환출자를 갖고 있는 대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2006년 전경련 의뢰로 신현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작성한 ‘기업 지배 구조의 개념, 대규모 기업집단 체제의 현황과 정부의 정책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5개 기업집단에서 5% 이상 순환출자가 5건 발견됐으나 2005년에는 10개 기업집단 14건으로 늘어났다. 집계 기준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작년 통계는 이 수치가 16개 기업집단 49건으로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을 보여준다.

신 교수는 “순환출자가 많은 기업집단으로 확산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 추진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부채비율 200%’ 정책이다. 외환위기 직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권유에 따라 각 그룹에 부채비율을 인위적으로 200% 밑으로 낮추도록 강제했다. 당장 빚을 줄일 수 없던 기업들은 자기자본을 늘리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대안으로 선택했다. 부채비율은 부채를 자기자본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부채를 줄이는 대신 분모인 자기자본을 늘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유상증자에 참여할 투자자가 많지 않아 대규모 실권주가 발생했고 결국 계열사들이 이를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그룹 분할과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대규모 인수·합병(M&A) 등이 순환출자의 확산 요인으로 꼽힌다. 이를 가장 잘 보여는 주는 것이 현대차 사례다. 과거 현대그룹은 63개나 되는 계열사를 거느렸지만 순환출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99년 정부의 업종 전문화 정책에 부응해 정세영 명예회장이 현대차에서 손을 떼고 현대산업개발로 친족 분리하는 과정에서 환상형 순환출자가 처음 등장했다. 정몽구 회장과 현대모비스가 갖고 있던 현대산업개발 지분을 정세영 회장과 현대산업개발이 보유한 현대차 지분과 맞교환 한 것이다.

두 번째 순환출자는 1999년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면서 나타났다. 외환위기 여파로 국내 자동차 산업은 사실상 초토화 상태였다. 국민 기업을 내세우던 기아차도 법정관리에 내몰렸다. 기아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였던 포드는 국내 생산 공장 일부 폐쇄 등 무리한 요구로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기아차 사태는 현대차의 인수로 돌파구를 찾았다.이를 위해 현대차와 인천제철이 기아차 지분을 각각 30.7%, 10.2% 인수했다. 이어 2000년 현대모비스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기아차가 현대모비스의 지분 19.9%를 사들였다.

마지막으로 2000년 9월 현대차가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계열 분리되면서 새로운 환상형 순환출자가 만들어졌다. 계열 분리로 인천제철의 경영권이 취약해지자 기아차와 현대캐피탈이 지분을 확보해 내부 지분율을 끌어올린 것이다.

신 교수는 “일부 시민 단체의 주장처럼 순환출자가 단순히 대주주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활용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계열 분리, 부실기업 인수, 민영화 기업 인수 등 순환출자가 등장한 역사적 과정을 무시하고 무조건 이를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현대차그룹을 해체하라는 말과 같다”며 “과연 그게 국민경제에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현실화된 M&A 위협…방어 수단 취약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자금 조달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은행 등을 통한 차입 대신 자본시장에서의 직접금융이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대주주의 경영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현종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차입에 의존하는 재무구조는 지배 주주로 하여금 보유하고 있는 주식 지분율을 높게 유지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즉 신규 사업을 위한 투자 자금을 주로 은행 대출 등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주주는 지분율 하락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상증자 등 직접금융은 대주주의 지분율 희석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외환위기 이후 적대적 M&A가 허용돼 경영권 위협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1997년 사전 승인 없이 10% 이상 지분을 취득할 수 없도록 한 ‘10% 룰’이 폐지됐고 25% 이상 지분 취득 시 공개 매수를 통해 50%+1주를 취득하도록 한 의무 공개 매수제마저 사라졌다. 주요 대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치솟았고 2004년 실제로 SK가 소버린의 적대적 M&A 타깃이 됐다. 당시 소버린은 1500억 원을 투자해 불과 2년 만에 560%의 수익을 챙겨 갔으며 SK그룹은 장기간 경영 공백 상태를 경험했다.

기업들은 한국의 경영권 방어 장치가 외국에 견줘 턱없이 취약하다고 토로한다. 해외는 상당수의 나라들이 차등주 발행과 포이즌필(적대적 M&A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값에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허용한다. 당장 자동차 업계만 봐도 폭스바겐·포드·푸조시트로엥(PSA)이 차등주를 통해 실제 소유 지분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행사하며 강력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도요타는 경영권 유지를 위해 순환출자는 물론 상호 출자도 활용한다. 반면 현대차는 그동안 순환출자에 위태롭게 의지해 왔지만 지금 이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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