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시 누가 죽였나] 해외 사례로 본 기업도시 ‘성공의 법칙’

정부 지원‘ 버팀목’…산학연 협력 ‘ 필수’

한국의 기업도시 관계자들이 벤치마킹 차원에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은 어디일까. 일본 도요타시, 스웨덴 시스타 사이언스, 핀란드 울루, 프랑스 그랑모토 등이다. 하지만 이들 해외 기업도시를 모델로 삼은 한국의 기업도시들은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업도시를 관할하고 있는 국토해양부의 관련 홈페이지마저 문을 닫은 상태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보안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해외 기업도시 관련 자료를 요청했지만 e메일을 통해 보내온 건 달랑 A4 한 장이다. “더 이상의 자료는 없다”는 게 정부 기업도시 담당자의 답변이다. 해외 기업도시의 성공 사례엔 중앙정부와 해당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아낌없는 지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산학연이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조율하고 도로나 철도 등의 인프라는 정부가 도맡았다. 각종 세제 혜택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과 가까운 일본의 도요타시는 세계가 알아주는 기업도시 성공 모델 중 하나다. 도요타시는 지자체의 끈질긴 노력과 대기업 본사와 공장, 부품 업체 등이 유기적 관계를 통한 산업 집적화로 성공한 곳이다.

도요타시는 대기업 공장 주변으로 관련 부품 업체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도시다. 도요타자동차의 본사와 12개 공장 중 7개, 미쓰비시 8개 공장 중 3개가 입주해 있다. 서울보다 1.5배 넓지만 시 인구는 42만 명이다. 재정 자립도는 전국 평균의 2~3배로 일본 최고의 부자 도시로 꼽힌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사이언스 시티 시스타(Kista). 김정욱기자 haby@2004.8.28

<YONHAP PHOTO-0558> In this photo released by Toyota Motor Corp., the new headquarters of the Japanese automaker in Toyota city is shown in this photo taken in May, 2007. Steadily, relentlessly, quietly. Toyota is closing in on dethroning General Motors, the longtime king of the world's automakers. On Friday, Aug. 31, 2007, Toyota set a global sales target of 10.4 million vehicles for 2009 _ a number that would put the Japanese company far ahead of the current industry record of 9.55 million vehicles that GM sold in 1978. (AP Photo/Toyota Motor Corp., HO) ** CREDIT MANDATORY **/2007-09-01 13:08:26/ <저작권자 ⓒ 1980-200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도요타자동차를 유치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뛴 지자체의 끈질긴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도요타시의 옛 지명은 ‘고로모’로, 원래 방직 산업이 발전한 곳이었다. 1930년대 들어 방직산업이 쇠퇴하면서 자동차 산업 진출을 위해 공장 부지를 찾고 있던 도요타자동차를 끌어들인 것이다. 도요타가 원하는 대규모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장유치위원회를 구성하고 200여 명의 땅 주인을 일일이 설득해 땅을 확보했다.

1935년 도요타 공장이 들어섰고 1952년 시 승격 후 입주 기업에 고정자산세와 서민세 등을 3년간 면제해 주는 공장 유치 장려 조례를 제정하는 등 지원책을 아끼지 않았다. 1959년엔 시 명칭을 아예 ‘도요타시’로 바꿨다. 1999년엔 고정자산세 외에 도시계획세와 사업소세 등을 최대 10억 엔까지 환급해 주는 제도까지 도입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도요타시 산업진흥책’을 추진했다. 기존 자동차 산업 진흥을 위해 신제품 개발, 연료전지 사업 등을 지원하고 신사업 창출을 위해 성장 산업에 대한 산업입지우대제도, 산업금융제도, 인큐베이팅 지원에 적극 나섰다.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시(이하 시스타)도 지방 정부 주도로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다. 특히 산학연 협력의 모델 케이스다. 시스타에는 스웨덴 간판 기업 에릭슨을 비롯해 노키아·IBM·컴팩·오라클·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유수 정보기술(IT) 기업과 관련 연구소 1000여 개가 입주해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삭막한 군사 훈련장이었던 시스타가 미국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IT 클러스터로 성장한 것은 긴밀한 산학 협력 관계가 발판이 됐다. 스웨덴왕립공과대학과 스톡홀름대학이 연합해 만든 ‘IT대학’은 시스타 입주 기업의 중요한 인력 공급 및 연구 지원 채널로 자리 잡았다. 원활한 산학협력을 위해 IT대학 내 산업위원회같은 공식 조직이 구성돼 있어 교수와 연구원들 간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능하다. 또 컴퓨터공학연구소(SICS)·에크레오연구소(ACREO)·IT연구소(SITI) 등 무선 네트워크 및 인터넷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책 연구소들이 대거 입주해 있다.

시스타의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1970년 초 설립된 ‘스톡홀름 토지 기업 입지 회사(SML)’다. SML은 공공 주택 업계의 대기업인 HSM을 통해 새로운 주거 단지를 건설하고 기업 유치 활동을 전개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500km 떨어져 있는 울루(Oulu)시는 북유럽 최초의 사이언스 시티다. 1982년 기업도시 추진 전담 조직인 테크노폴리스를 설립해 기업 입주를 본격 추진한 결과 현재 핀란드 경제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입주 기업은 노키아·HP·선 등 250여 개 기업으로 고용 인력만 1만여 명이다.

울루시는 도시계획 수립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고 장기적인 전략으로 빛을 봤다. 핀란드 정부는 1993년 새로운 국가 산업 전략으로 ‘클러스터 정책’을 도입한다. 산업 정책을 ‘산업별 접근 방식’에서 ‘클러스터 접근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행정 구역별로 한 개의 공과대학을 세우고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과학도시(Technopolis)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모두 19개의 사이언스파크가 대학 소재지를 중심으로 건설됐다. 또 8개의 산업별 클러스터를 선정하고 이 중 정보통신 클러스터를 집중 육성했다. 기술 개발 예산의 절반 이상을 정보통신 클러스터에 지원했다. 이 정책을 통해 울루 테크노파크가 탄생한 것이다.

문제는 기업 유치였다. 울루는 기업 친화적인 도시 계획을 수립해 기업 유치에 성공했다. 계획 수립 과정의 각종 의사결정 단계에 기업을 참여시켰다. 기업 부지는 시에서 토지를 매입해 분양하는 방식으로 제공했다. 울루시 당국은 1982년 기업 활동 지원을 총괄 담당할 (주)울루사이언스파크를 설립했는데, 이후 테크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꿨다.



철도·도로 등 인프라 지원은 기본

테크노폴리스는 바이오테크 부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메디폴리스(Medipolis)와 하이테크 산업을 담당하는 이노폴리(Innopoli)라는 자회사를 두고 있다. 테크노폴리스는 울루시가 주도하는 가운데 노키아 등 19개 입주 기업, 울루대학, 중앙정부 등이 이사회 회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의장인 울루시 시장은 시위원회에서 선정되며 반영구직으로 10년 이상을 재직하며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1999년엔 세계 최초로 도시 자체를 울루 테크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헬싱키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중부에 있는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RTP)도 한국의 기업도시가 배워야 할 곳이다. ‘동부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RTP는 140개 연구·개발 기업과 35개 서비스 기업이 입주해 있다. IBM·시스코시스템스·머크·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등 세계적 기업들이 즐비하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 내 49위를 차지할 정도로 가난한 지역이었던 노스캐롤라이나는 상전벽해 같은 변화에 성공했다. 겨우 몇 개 대학과 담배 농사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던 곳에 연구 단지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내놓았을 때 지역민들은 모두 미쳤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1965년 IBM이 들어오면서 RTP의 덩치는 급속히 커졌다. RTP의 성공은 산학연 협동이 유기적으로 이뤄진 점을 첫 번째로 들 수 있다. 듀크대·노스캐롤라이나대·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등 3개 명문 대학들이 의학·공학·전자·생명공학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을 기업에 공급하고 있다.

지중해 최대 종합 해양 관광지로 발전한 프랑스의 그랑모토시도 기업도시의 전형적인 사례다. 2004년 기준 상주인구는 8500명에 불과하지만 연간 120만 명의 관광객을 통해 관광 수입이 4억 유로에 달한다. 인근 거주민들은 그랑모토의 서비스업이나 인근의 요트 제조업 등에 종사하는 등 고용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그랑모토는 민·관 합동 개발 회사인 SADH가 전권을 위임받아 범정부적인 지원으로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것이 주효했다. 추진체가 민·관 합작 공사로 공공자금 투입이 용이했다. 지난 30여 년간 민간 자금보다 공공 투자 자금이 더 많았다.

관광레저도시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인 접근의 용이성을 위해 정부가 앞장서 도로·철도 등 인프라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그랑모토와 불과 12km 떨어진 지점에 국제공항이 들어선 데다 24km 지점엔 몽플리에 철도역이 들어서 파리에서 고속열차로 3시간 내 도착할 수 있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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