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리더십] 정의론의 원조 존 롤스, 측근 대신 최말단 직원과 소통하라

김형철 교수의 고전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인간은 정의로운 세상에 살기를 원합니다. 부정의한 세상에서 부당하게 대우받으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정서 중 하나인 한(恨)은 사실 부당한 대우를 억울하게 받은 것에 대한 정서적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그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조차 없을 때 우리네 마음속에는 한이 쌓입니다. 이 한풀이를 하지 못하면 결국 사람은 화병으로 죽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정의가 완벽하게 실현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부정의 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정의로운 분배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도출할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1921년에 태어나 하버드대 철학과 명예교수로 있다가 2002년에 죽습니다. 그는 1958년부터 정의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한 이후 평생 동안 정의라는 주제 하나에만 매달려 온 철학자입니다. 1971년 출간된 그의 대표 저술인 ‘정의론’에서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그 유명한 ‘정의의 두 원칙’을 내세웁니다.

제1 원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정치적 자유를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 평등하게 누려야 합니다. 쉽게 말해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피자를 나누는 가장 정의로운 방법

모든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간섭 받지 않고 자신의 양심, 종교, 정치적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똑같이 향유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학술 세미나에 참석했다고 합시다. 그곳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은 전체 시간을 참석자 수로 나눈 것이 1인당 배정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참석자가 그 평균 시간에 맞춰 반드시 발언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 토론이 아니겠죠. 어떤 사람은 좀 더 많이 발언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더 많이 들으면서 균형점을 찾아 갈 겁니다. 누군가가 시작부터 끝까지 발언을 독점하거나, 또 모두가 똑같이 발언 시간을 가져가는 것은 둘 다 자유롭지 못한 토론입니다.

롤스 정의의 제2 원칙(차등 원칙이라고 불림)에 따르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의 배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분배돼야 합니다. 단, 그 불평등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 자체는 평등하게 부여돼야 합니다. 차등 원칙은 어떤 때 적용될까요.

여기 4명의 사람이 모여 프로젝트 미팅을 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모두 수고한다고 상사가 피자 한 판을 보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피자에는 금이 그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상태에서 어느 누구도 서로 적게 먹을 생각이 없습니다. 상당히 배가 고픈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의로운 분배는 모두에게 똑같은 사이즈의 피자가 돌아가도록 자르는 것입니다.

해결책은 피자를 자르는 사람이 제일 마지막 조각을 먹도록 순서를 정하면 됩니다. 조금이라도 큰 조각을 먹고 싶어 크게 잘라 놓으면 그 큰 조각이 자신에게 돌아올 확률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균등하게 자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장 크게 먹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분배는 항상 모든 사람이 평등한 몫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롤스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분배가 평등 분배보다 우월하다는 겁니다.

롤스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3명이 살아가는 사회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식에 따르면 모두가 30, 30, 30을 가지는 평등 분배입니다. 두 번째는 40, 50, 60의 불평등한 분배입니다. 롤스는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더 불평등함에도 불구하고 더 정의로운 분배라고 주장합니다. 왜냐고요? 두 번째 분배에서 가장 열악한 40도 첫 번째의 30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 방식에 따르면 25, 35, 80의 분배가 이뤄진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롤스는 세 번째가 전체 합이 제일 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의 평등 분배보다 정의의 관점에서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고요? 최소 수혜자의 몫인 25가 평등 분배인 30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차등 원칙이 말하는 최소 수혜자에 대해 최대한 배려하라는 말의 참뜻입니다. 최소 수혜자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조직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감으로써 협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협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 결과물이 정의롭게 분배돼야 합니다. 그런데 차등 원칙이 정의롭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롤스는 우리를 ‘원초적 입장’이라는 사고 실험으로 초대합니다.



최소 수혜자에 대한 최대 배려

이 원초적 입장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가지 재미있는 가정을 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향상에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얼마나 잘사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지의 장막’이라고 불리는 인식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무지의 장막 뒤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다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국적, 성별, 신체적 특성, IQ, 종교 등과 같이 자신의 특수성을 전혀 모른다고 가정합니다.

거울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나 할 수 있겠죠.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제도를 원할까요. 노예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선택할까요. 주인으로 살면 좋지만 노예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만장일치의 합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어떤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최소 수혜자가 그 어떤 사회보다 제일 배려 받고 있는 사회가 가장 정의로운 사회라고 주장합니다.

조직 내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과 소통해 보셨습니까. 자신의 주변에 있는 측근만 늘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신지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조직 내에 있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롤스는 정의로운 사고를 하기 위해 우리에게 ‘자신을 잊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항상 의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리더는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봅니다. 리더는 모두를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모두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전체를 봐야 합니다.

모두를 끌고 가는 리더는 전체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전체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무지의 장막 뒤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일하고 있는 부하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직의 최말단에 있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가까운 측근들의 이야기는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단의 말단에 있는 직원 얘기와 측근 얘기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일치할 때까지 끊임없이 소통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를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소통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최소 수혜자에 대한 최대의 배려는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 주는 것입니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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