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STX 그룹, 자존심 접고 실리 택해 … 다음 승부수는

비즈니스 포커스

“그룹 내 사업이 B2B(Business to Business: 생산재를 뜻함)뿐이다 보니 불황에 클라이언트만 바라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최근 잇따른 자금 악화설로 위기를 맞고 있는 STX그룹 한 관계자의 말이다. 2001년 그룹 출범 이후 거침없이 이어지던 강덕수 STX그룹 회장의 기업 인수·합병(M&A) 전략이 벽에 부딪친 이유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STX그룹은 5월 31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재무 개선 약정을 체결하며 위기를 기정사실화했고 6월 5일에는 한국신용평가가 5개 주요 계열사의 신용 등급 및 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산업은행과의 재무약정은 국가로 치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과 비슷한 상황이다. 경영의 자율성보다 채권단과의 재무약정 이행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또 재무약정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재무구조가 좋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 한진그룹은 재무약정에 반대해 체결을 지연했고 현대건설 인수를 앞뒀던 현대그룹은 채권단의 재무약정 요구에 맞서 소송을 불사하기까지 했다.



‘B2B’ 위주 사업 구조가 ‘발목’

앞서의 STX 관계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STX그룹의 핵심 사업이 조선·해운·중공업·발전 등 이른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에 치중돼 있어 리스크 분산이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STX그룹의 주요 계열사로는 지주사이자 무역업을 하는 (주)STX, 해운 업체인 STX팬오션, 조선 업체인 STX조선해양, 선박용 엔진을 제작하는 STX엔진, 발전소 건설·운영 업체 STX에너지, 플랜트 및 담수화사업을 하는 STX중공업 등이 있다.

이들 업종의 특징은 판매 단위 가격이 수십 억~수천 억 원에 이르고 제작 기간도 1년이 넘다 보니 업황이 좋지 않을 때 쉽게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구조다. 소비재라면 불황에 맞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대형 마트라면 수입산 농산물을 적극 소싱하거나 저가형 프라이빗 브랜드(PB) 제품을 개발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현대자동차는 해외 금융 위기 때 공격적인 보증 마케팅으로 미국과 유럽에서의 점유율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재는 디자인·마케팅 등 소비자에게 소구할 수단이 없어 불황을 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쌍용중공업의 후신인 STX그룹은 2001년 출범 이후 STX조선해양(2001년)·STX에너지(2002년)·STX중공업(2004년)·STX팬오션(2004년)을 인수하면서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M&A 성공→실적 개선→상장(자금 확보)→추가 M&A 착수’라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쌍용중공업 직원 출신으로 재계 20위권의 대기업을 일군 강덕수 회장은 2000년 이후 국내에서 유일한 ‘샐러리맨 신화’이기도 했다.

STX그룹이 인수한 기업들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유사 업종으로 이뤄져 있다. 무역 업체인 (주)STX가 STX팬오션에 일감을 주고, STX팬오션이 STX조선해양으로부터 선박을 구매하고, STX조선해양은 STX엔진으로부터 선박용 엔진을 공급받고, STX엔진은 STX중공업으로부터 부품을 조달하고, STX중공업은 STX에너지의 플랜트 건설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은 호황기일 때 ‘선택과 집중’이라는 면에서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소비재와 생산재 업종이 섞여 있던 두산그룹도 맥주(OB맥주)·소주(처음처럼)·식품(종갓집 김치) 등의 소비재를 매각하고 중공업·건설기계·건설 등으로 주력 업종을 재편한 바 있다. 두산도 한때 중소형 건설기계 제조업체인 밥캣 인수 이후 위기설이 돈 바 있다. STX그룹도 2008년까지는 M&A 전략에 거침이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불황기 때는 리스크 분산이 어려워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STX그룹은 지난 몇 년간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난해 하이닉스반도체 매각 때 인수를 검토하기도 했고 2010년에는 대우건설 인수 참여설이 돌기도 했다. 2009년에는 현대종합상사 인수를 검토한 적도 있다.



STX의 고민 ‘1~2위가 없다’

STX의 두 번째 고민은 ‘세계 1위가 없다’는 것이다. STX 관계자는 “B2B라도 업계 1~2위는 괜찮다”고 말했다. 업계 1~2위가 된다는 것은 독보적인 기술 또는 가격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호황기 때는 모두가 업계 1~2위의 제품을 구매하려고 하지만 물량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3위 이하의 업체에까지 주문이 들어온다.

그러나 불황기 때는 주문량이 하위 업체에서부터 줄어들기 때문에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업체는 하나둘씩 고사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 다른 이유는 불황기에 대형 업체들이 자금력을 앞세워 하위 업체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펴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치킨 게임’을 통해 업계가 재편되는 과정을 주기적으로 거친다. 최근 일본 엘피다반도체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매물로 나온 바 있다.

해운업은 국내 1, 2위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조차도 세계 1위 머스크가 주도하는 치킨 게임에 밀려 적자가 쌓이는 중이다. 2003년 세계 5위였던 한진해운은 10위권 밖으로 밀릴 것으로 보이고 현대상선 또한 간신히 20위 안에 위치하는 상황이다. 한때 30위 이내에 들었던 STX팬오션은 30위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지난해 STX팬오션은 18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STX조선해양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 포함)과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에 이어 국내 4위로 국내 점유율이 13.3%(2011년 전체)에서 올 1분기 14.7%로 올랐다. 그러나 수주 잔량은 계속 줄고 있는 상황이다. 연관 업종에 있는 다른 계열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STX그룹에 대한 시장의 우려는 작은 편이다. 일단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으면서 급한 불은 끈 상태고 이 기회에 확장 일로이던 사업 구조를 재편해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면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이 불협화음 없이 조용하게 넘어간 것도 강 회장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STX그룹은 현재 STX중공업과 STX에너지 등 비상장 계열사 지분과 STX팬오션이 보유한 선박, 해외 자원 개발 법인 지분 등 1조 원 정도의 자산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5월 우선 협상 대상자가 선정된 해양 특수선(OSV: Offshore Support Vessels) 업체 STX OSV 매각도 진행 중이다.

박성봉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그룹이 제시한 STX중공업과 STX에너지 기업공개 건은 투자 매력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에 투자 매력도가 높은 자산의 매각이 요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5월 24일)”고 예상했다. 채권단이 현재 검토 중인 재무구조 개선안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할 때에는 알짜 계열사를 매각해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다는 얘기다. 강 회장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어떤 승부수를 던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편 그룹 내 가장 큰 매출을 담당하고 있는 STX팬오션의 영업 실적은 점차 개선될 전망이다. 양지환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대신증권의 전망이 맞는다면 STX팬오션은 2012년 4분기부터 영업이익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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