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 동대문 패션왕] “콤플렉스 덩어리…‘깡’이 나의 경쟁력”

동대문 패션왕①-최범석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

‘월 매출 2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키운, 그리고 연예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 드라마 ‘패션왕’의 실제 인물로 잘 알려진 최범석 디자이너에게 따라다니는 소개말이다. 남성 캐주얼 의류로 연 6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제너럴 아이디어의 최 대표는 여러 면에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다. 가난한 집안, 중졸 학력, 맨손으로 사업을 일군 점 등의 자수성가 스토리는 비슷한 환경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꿈을 준다.

약력:1977년생. 중졸. 열일곱 살 때 홍대 앞 옷 노점을 시작으로 의정부에서 의류 소매점 ‘치즈’, 동대문 의류 도매점 ‘무(無)’를 운영. 2003년 서울컬렉션 데뷔. 2009년 뉴욕컬렉션 데뷔. 현재 제너럴 아이디어 대표이자 서울예술종합학교 패션디자인과 교수.



17살 때 노점상이 ‘패션왕’의 첫 시작

“어릴 때 얼마나 못 살았느냐를 얘기해야 더 극적이 되는 거죠”라며 그는 자신의 스토리를 시작했다. “정말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고 말하는 그는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를 ‘투명인간’ 같은 아이였다고 말한다. 형들과 동생 사이에서 부모의 관심도, 선생님의 관심을 받는 아이도 아니었다. 여섯 식구가 21.5㎡(6.5평)에서 살았고 어머니가 동네 약국 앞에서 떡을 파는 노점상을 했다. 그 떡가게의 이름은 ‘범석떡집’이었다.

“중 2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친구들을 잘못 만나 담배를 배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3학년 때 파출소에 불려갈 정도로 날라리였다고 한다. 경찰이 “너 꿈이 뭐냐”고 질문하자 그는 “킬러”라고 답했다. 당시 유행하던 영화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꿈이 없었습니다.” 경찰의 질문 이후 최 대표에게 ‘나의 꿈’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마음에 남게 된다.

열일곱 살 때 만난 여자 친구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두 살 연상의 여자 친구와 함께 옷 구경을 다니고 일본 패션 잡지 과월호를 보면서 옷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옷을 볼 때, 옷 얘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아, 나는 옷을 해야겠구나’라고 마음먹은 것이 이때부터다.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2년 동안 돈을 모은 뒤 노점을 하기 위해 명동·신촌에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그는 이를 ‘벽’을 빌리러 다녔다고 표현한다. 마침 홍대에 눈에 띄는 ‘벽’이 있어 집주인에게 벽을 빌려달라고 해 노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첫 사업은 실패였다. 두 달 동안 옷이 팔리지 않자 양말을 가져다 팔기 시작했다. ‘내가 이걸 하려던 게 아니었다’는 좌절감과 동시에 ‘옷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원단을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동대문시장의 원단 가게에서 4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20만 원을 저축하고 10만 원으로 영어 학원을 수강하고, 10만 원을 생활비로 썼다. 이렇게 5개월 동안 100만 원이 모이자 그는 부산으로 향했다. 생초보에게는 원단의 ‘원’자도 알려주지 않고 허드렛일만 시키는 데서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부산에서 노점을 시작한 그는 악착같이 옷을 팔았다. 1년 조금 더 되는 시간에 3000만 원이 모였다. 노점은 비 내리는 날이 휴일이다. 노점상 어머니에 이어 그도 노점을 하자 ‘지붕 있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싶은 꿈이 샘솟기 시작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3000만 원은 가게를 내기에는 적은 돈이었다. 마침 의정부에 사는 친구의 동네가 떠올라 그곳에 ‘치즈’라는 매장을 냈다. “안 자도 안 졸리고,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팠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생애 첫 가게를 차린 당시 소감이었다.

오픈 첫날 하나도 팔지 못한 불안감도 잠시, 둘째 날부터 조금씩 물건이 팔리기 시작하고 다음날 조금씩 더 팔리면서 몇 달이 지나자 그의 가게는 의정부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게가 됐다. 그러나 성공도 잠시, 그의 가게가 유일한 옷가게였던 식당 골목은 비슷한 옷가게로 하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옆 가게들이 그가 떼어오는 옷들과 비슷한 옷을 더 싼값에 가져오는 것이었다. 옷에 대한 감각은 그가 앞섰지만 장사 수완은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디자인 변경. 동대문 도매상에 가서 자신의 디자인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먹혔다. 그리고 ‘아 나도 디자인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직접 옷을 만들려고 하자 다시 ‘원단’이라는 문제에 부닥쳤다. 당시 원단 가게를 기웃거리는 파릇파릇한 패션학과 학생들 때문에 원단 가게에서는 스물한 살짜리가 와서 ‘원단 샘플 좀 보자’고 하자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상가 상우회 사무실에 떡볶이를 사들고 찾아가 원단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한 달을 그렇게 했더니 상인들에게 반응이 왔다 “야, 떡볶이 말고 다른 거 좀 사와라.”



‘꿈은 크게, 목표는 작은 것부터’

그렇게 물꼬가 트였고 타고난 감각과 알음알음 배운 옷 제작 기술이 어우러지면서 그는 도매상들에게 옷을 파는 제작자가 됐다. ‘무(無)’라는 가게를 연 그는 새벽에 옷을 팔고 오전에 공장을 돌고 오후에 옷을 가져오는 고단한 일과를 2년 동안 이어갔다. 그는 “그 2년이 나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는 ‘일단 앞집부터 이겨보자’, ‘일단 이 골목에서 1등을 해 보자’고 차근차근 목표를 이뤄갔다. “그렇게 했더니 어느 날 동대문에서 1등을 하고 있더라고요.”

제법 유능한 ‘옷 제조업자’가 되자 강남의 부자 친구도 생기기 시작했고 스타일리스트와도 친분이 생겼다. “그들이 얘기하는 ‘디자이너’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호기심이 생긴 그를 선배인 홍은주 디자이너가 파리로 데려갔다. 태어나 처음 보는 패션쇼 무대를 그는 ‘큰 잔상이 남았다’라고 표현했다.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꾸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만의 ‘컬렉션’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 패션쇼 관계자들은 “넌 학벌도 집안도 없는데, 널 뭘 보고 해줘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배경도 없는 동대문 장사치가 디자이너 행세를 하느냐는 것이다. “가진 건 ‘깡’뿐이었다”는 그는 9번을 거절당하고 10번째 디자인을 보여준 뒤 비로소 스물여섯 살에 서울 컬렉션을 통해 최연소 디자이너로 데뷔할 수 있었다. 이후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다음 스테이지는 해외 컬렉션. 그는 스태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욕 컬렉션에 도전했지만 첫 도전에서 관심을 끄는 데 실패했다. 한국서 잘해냈다는 자신감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심한 좌절을 겪었다. ‘이걸 더 해야 하나’라며 자책했지만 결론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내가 가진 것은 끈기와 깡 뿐’이라는 것이었다. 연거푸 도전한 뉴욕 컬렉션 세 번째 도전에서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주문도 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활동은 범위가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고 사업은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드라마 ‘패션왕’이 한창 방영중일 때 그는 한 케이블 TV에 출연해 자신이 ‘중졸’이라고 고백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의 학력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다. “제가 유명해지면서 신문에도 나고 하니까 아버지가 전화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대학을 갔다면 더 잘됐을 걸’이라고요. 저는 ‘아버지가 절 대학에 보냈다면 다른 대학생들보다 더 바보같이 살았을 거예요’라고 말했죠.”

그는 가난과 부족함이 그의 경쟁력이라고 밝혔다. “전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콤플렉스를 가졌기 때문에 이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현재 그는 서울예술종합학교 패션디자인과 교수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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