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권위자’ 조광수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연구소 소장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남긴 화두 중 하나가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디자인을 뛰어넘어 사용자의 총체적 경험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소비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중심이라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애플의 성공에 충격 받은 한국 업체들도 뒤늦게 UX 전문가를 대거 채용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업체들뿐만 아니라 통신·가전·인터넷 기업들도 이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UX는 여전히 아리송한 개념이다. 조광수(43)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연구소장은 “사용자 개인이 아니라 전체 소비 생태계를 봐야 한다”며 “잘 만든 단품으로 승부하던 시대, 위대한 제품이 성공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인지과학과 정보과학을 전공한 조 소장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 육성 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신설된 이 대학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지난 3월 20일 명륜동 연구실에서 조 소장을 만났다.
UX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사용자가 어떻게 경험하는지 이해하고 제품을 만들자는 뜻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아직도 제품을 잘 만드는 걸 UX로 오해하고 있어요. UX는 사용자 한 개인의 이슈가 아니라 전체 소비 생태계를 봐야 해요. 전략적 차원의 문제인 거죠. ‘어떻게 디자인을 잘할 것인지’, ‘어떻게 제품을 잘 만들 것인지’ 하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잘 만든 단품으로 승부하던 시대, 위대한 제품이 성공하던 시대는 끝났어요.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데요.
요즘 아마존의 킨들 파이어가 선풍적인 인기죠.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이 제품은 카메라도 없고 구글 인증도 안 받아 유튜브도 볼 수 없어요. 미국 밖으로 나가면 비디오 다운로드도 안돼요. 제품 자체로 보면 별로 우수한 제품이 아니죠. 그런데 지금 없어서 못 팔 정도예요. 아이패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삼성전자 갤럭시탭도 못 만든 제품이 아니에요. HP·모토로라·도시바도 괜찮은 패드 제품을 내놓았어요. 그런데도 아이패드가 장악한 시장에서 명함도 제대로 못 내밀고 있죠. 단품 전략으로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어요.
아이패드는 제품 자체로도 뛰어나지 않습니까.
작년 아이패드2가 나오자 모두 놀랐어요. 두께가 얇아지고 스펙은 올라갔는데 가격은 그대로였거든요. 삼성전자에서 난리가 났어요. 마치 정보기술(IT) 제품의 성공은 두께에서 결정된다는 분위기였죠. 그렇게 해서 아이패드보다 두께를 더 얇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데 이번에 뉴 아이패드가 나왔는데, 두께가 더 두꺼워졌어요. 기가 막힐 일이죠.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아이패드 두께를 더 줄였어야 하거든요. 애플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뉴 아이패드에 담긴 애플의 전략은 무엇입니까.
화질이 몰라보게 선명해졌어요. 그걸 삼성전자밖에 못 만든다고 해요. LG디스플레이도 힘들어 한다는 거죠. 자세한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지만 화면 설계를 애플에서 주도했다는 인상을 받아요. 화면이 밝아지고 더 좋아진 것은 단순히 스펙 문제가 아니에요. 벌써 게임 업체들이 뉴 아이패드에 관심을 보여요. 콘텐츠를 묶어 주는 애플의 플랫폼 전략이 노골화되는 거죠. 한국 업체들은 아직도 제품 전략에만 사고가 맞춰져 있어요. UX에서 말하는 사용자 경험은 잘 만든 좋은 제품 하나가 주는 경험이 아니라 제품과 제품의 생태계가 이뤄 내는 솔루션이 갖는 경험을 의미하죠.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는 어떻습니까.
갤럭시 노트가 나오고 깜짝 놀랐어요. 삼성전자가 처음으로 자신만의 스마트폰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에요. 타이핑이나 터치로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쓰기에 대한 욕구를 건드린 거죠. 일본 와콤의 필기 기술을 과감하게 채용했어요. 내부에서 모든 걸 다 하기보다 좋은 기술을 가져다 쓰는 애플의 전략을 배운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용자들이 갤럭시 노트를 사는 이유는 ‘필기’가 아니라 ‘사이즈’라는 거예요. 주로 30대 후반에서 40대 주부들이 많아요. 화면이 크고 시원해 웹서핑에 편리하고 백에도 충분히 넣을 수 있거든요. 삼성전자의 정밀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기보다 여러 개 뿌려놓은 제품군 중 하나가 성공한 것이라고 봐요. 한 손으로는 조작이 불가능한 UI도 한계를 보여주죠.
노트 기능은 어떻게 발전할까요.
노트 기능이 빛을 볼 수 있는 곳은 교육 시장이에요. 전자책이 오랫동안 이 시장에서 고전하는 이유가 바로 필기가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전자책을 잘 만들어도 학생들의 노트북을 대체할 수 없어요. 갤럭시탭에 노트 기능이 꼭 들어가야죠.
애플도 교육 시장 공략을 선언했는데요.
애플은 이미 엄청난 교육 콘텐츠 망을 구축하고 있어요. 아이튠즈 유니버시티나 애플 캠퍼스를 통해 거의 모든 온라인 강좌를 아주 편리하게 즐길 수 있어요. 이번에 선보인 ‘아이북스 어서’는 또 한 번 대박을 예고해요. 이제 길거리에 널려 있는 콘텐츠마저 자신의 생태계로 흡수해 버릴 겁니다. 정말 무서운 애플리케이션이죠. 교육 콘텐츠를 가장 많이 만드는 게 누굴까요. 바로 교사들이죠. 각종 교재와 강의 노트를 거의 매일 만들어요. 문제는 파일 형식이 모두 다르고 한곳에 모아져 있지 않다는 겁니다. 아이북스 어서는 너무 쉬워 누구나 금방 전자책을 만들 수 있어요. 거기다 그렇게 만들 걸 아이튠즈로 모아 서로 공유하고 나눌 수 있게 해줘요. 완벽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거죠.
다음 격전장은 스마트 TV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옵니다.
사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스마트 TV가 모든 전자제품의 허브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거실에 갖다 놓고 사람들이 모이면 허브가 되는 걸까요. 이미 TV 세상은 끝나고 있어요. 19~24세는 거의 TV를 안 봅니다. ‘본방 사수’ 문화도 없어진 나라에서 TV가 허브가 된다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거죠. 사용자가 빠진 생태계 전략의 사례예요.
애플이 애플 TV에 집중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애플 TV를 내놓을 겁니다. 내가 말하는 건 TV를 없애자는 게 아니에요. 단순한 전략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홈 네트워크 전략은 2000년대 초반에 삼성전자에서 이미 나왔어요. 소니도 그걸 하다 망하지 않았나요. 애플의 방향은 두 가지일 겁니다. 우선 기존 TV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거예요. 요즘 한국만 해도 채널 수가 수백 개가 넘어요. 리모컨이 복잡해 나이 든 분들은 TV 켜기도 어려울 정도죠. 아이폰4S에서 선보인 음성인식 개인 비서 서비스 시리(Siri)를 활용하면 놀라운 변화가 가능할 거예요. 또 하나는 애플의 강점인 콘텐츠 허브화죠. 이를테면 미국 케이블 업계 1위인 넷플렉스를 콘텐츠 공급자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애플 생태계의 높은 보안성과 편리한 결제 시스템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죠.
시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앞으로 지능형 서비스가 점점 중요해질 겁니다. 이 분야에서 구글이 뛰어난 기술력을 갖고 있지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빅뱅’을 치면 가수 빅뱅에 대한 검색 결과가 나오고 물리학 전공자가 치면 스티븐 호킹의 ‘빅뱅이론’에 대한 논문이 나오는 거예요. 시스템이 사용자에 대한 지식을 갖는 거죠. 페이스북도 비슷한 노력을 해요. 예전에는 친구 관계만 알려줬지만 이제는 낯선 사람과도 숨은 공통점을 찾아 줍니다.
이를테면 A와 B가 같은 장소에 간 적이 있으면 그걸 찾아내요. 관계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거죠. 구글 지도도 확대하거나 축소할 때 사용자의 목적에 맞춰 주변에 나타나는 것을 보기 쉽게 조절해 줍니다. 인공지능만 보면 IBM 왓슨이 앞서가요. 시리가 준 충격은 이런 지능형 서비스가 소비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죠. 거기에 비해 네이버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검색하면 한 페이지 가득 광고가 먼저 뜨거든요. 자칫하면 방심하다가 한 방에 무너질 수 있어요.
약력:1969년생. 2004년 피츠버그대 인지과학 박사. 2006년 미주리대 정보과학·학습공학·전산학과 교수. 2009년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2012년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연구소 소장(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